[씨네21] 이번에는 대영박물관으로 향하다
시리즈 3편 <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
모두가 잠든 시간, 굳어 있던 존재들이 비밀스럽게 살아나 움직인다는 이야기. 아마 전세계 모든 어린이들이 침대 머리맡에서 한번쯤 들어보았거나 꿈꾸었을 에피소드일 거다. 하지만 이 마법의 시간은 대개 아이들의 좁은 방구석이나 이집트의 고대 유적지 같은 현실 너머의 공간에 내려앉았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가 등장하기 전에는. 지난 2006년 크리스마스 시즌 북미에서 개봉해 쟁쟁한 연말 개봉작들 사이에서 3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켜낸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세상에서 가장 고색창연한 장소였던 박물관을 과거의 존재들이 살아 움직이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생명력이라곤 없어 보이는 딱딱한 밀랍인형들과 지루하기 그지없는 해설이 존재하는, 역사에 관심 많은 이들을 제외하면 그저 아이들의 방학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는 곳으로 치부되던 박물관이 이집트 석판의 영향으로 밤마다 마법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는 설정이 가족 단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1편의 배경이 된 뉴욕 자연사박물관의 평균 관람 인원이 영화 개봉 뒤 20%나 증가했으며, 워싱턴에 위치한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을 배경으로 한 <박물관이 살아있다2>의 개봉을 앞두고 관객을 빼앗길세라 미국 전역의 박물관들이 앞다투어 ‘나이트 투어’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시각효과와 스펙터클, 액션… 무엇보다 캐릭터
1편 개봉 당시만 하더라도 시즌 특수를 겨냥한 그저 그런 가족영화일 거라 짐작됐던 이 시리즈가 어떻게 전세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핑크 팬더> 등의 작품을 연출하며 코미디에 재능을 보이던 감독 숀 레비와 제작진의 영리한 기획이 이 시리즈의 흥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본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이십세기 폭스사의 아이템 창고에 유물처럼 간직 되어 있던 프로젝트였다. 폭스는 크로아티아의 일러스트레이터인 밀란 트랭크의 1993년작, <한밤의 박물관>(Night at the Museum, 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하다)의 판권을 90년대 중반 사들였지만 이 작품을 어떻게 영화화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귀여운 삽화가 수록된 이 32페이지 분량의 어린이용 그림책은 박물관에서 밤마다 깨어나는 공룡이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뉴욕 자연사박물관의 야간경비원의 고군분투를 담고 있었는데, 박물관과 공룡이라는 블록버스터급 아이템을 소화하기란 여간 만만치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에 합류한 숀 레비는 이 영화를 <쥬만지>나 <자투라: 스페이스 어드벤쳐> 같은 본격 어드벤처 장르물로 만드는 대신 다양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시각효과와 스펙터클, 액션” 장면을 잘 연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가족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객과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할 캐릭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박물관’ 시리즈는 작품마다 하나의 큰 사건을 쫓되 그 사건을 둘러싸고 온갖 소동을 일으키는 캐릭터들의 면면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건 엄숙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박물관 속 존재들의 귀엽고 황당무계한 모습일 거다. 콧대 높은 로마 군인(스티브 쿠건)과 다혈질 카우보이(오언 윌슨)가 손가락만 한 크기의 미니어처로 등장해 온갖 고초를 당하는 모습이나 사람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되바라진 원숭이, 인디언 미녀와 사랑에 빠진 미국 대통령(로빈 윌리엄스) 등 어딘가 나사가 풀린 듯 허술한 모습으로 사고를 치고 다니며 박물관의 야간경비원 래리(벤 스틸러)의 혼을 쏙 빼놓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박물관이라는 공간 특유의 고고함과 딱딱한 분위기를 명랑쾌활하게 전환한다.
그러나 이들 캐릭터를 지켜보는 진짜 즐거움은 쟁쟁한 코미디언들의 호흡을 감상하는 데에 있다. 주연배우 벤 스틸러는 물론이고 <앨런 패트리지>로 유명한 영국 코미디언 겸 배우 스티브 쿠건, 드라마 <오피스>의 리키 저베이스(자연사박물관장으로 출연한다), 코믹 전문 배우는 아니지만 괴팍하고 엉뚱한 인물을 연기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오언 윌슨, 2편에서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경비원으로 카메오 출연했던 조나 힐이나 3편인 <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에서 대영박물관의 야간경비원을 맡은 호주 출신 코미디언 레벨 윌슨 등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지금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큰 웃음을 주는 배우들이다. “벤 스틸러, 로빈 윌리엄스, 리키 저베이스 등은 시나리오를 감독이나 작가만큼이나 잘 이해하고 있는 배우들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있다. 감독은 그런 배우들의 역량을 맘껏 펼칠 수 있게 열어주어야 한다.” 감독 숀 레비의 말대로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는 배우들의 역량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는 프랜차이즈다. 이 시리즈에 참여한 배우들은 저마다 즉흥연기에 뛰어나며, 이 프랜차이즈 현장이 그런 그들의 장점을 수용하는 데 늘 열려 있었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는 이 시리즈를 만들 때마다 항상 이런 말을 했다. 굉장히 위험한 장면이고, 관객에게도 긴장감이 그대로 전달되는 장면임에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것도 긴장감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이다.” 주연배우 벤 스틸러의 말처럼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의 핵심은 즉흥적이고 코믹한 배우들의 호흡과 애드리브, 감각에 있는 듯하다. 1편의 경우 숀 레비 감독이 “웃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각효과 촬영 첫날 벤 스틸러와 상의 끝에 한신 전체를 들어내는 바람에 스탭들의 원성이 자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월15일 개봉 예정인 시리즈의 3편 <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은 전편 못지않게 웃음으로 무장한 작품이지만, 프랜차이즈의 마지막 영화임을 고려한 듯 애상적인 분위기도 가득하다. 자연사박물관의 전시물들에 밤마다 생명을 불어넣어주던 황금석판이 서서히 부식되어간다. 박물관장이 기획한 야밤의 박물관파티는 석판의 부식과 함께 이상해져가는 전시물들의 돌발 행동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래리는 박물관 친구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원인을 찾기 위해 석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아크멘라의 부모(벤 킹슬리가 아크멘라의 아버지 메렌카레로 출연한다)가 있는 런던 대영박물관으로 떠난다.
로빈 윌리엄스와의 마지막 만남
시리즈를 마무리짓는 3편의 주요 테마는 “이별과 새로운 시작”이라고 숀 레비 감독은 말한 적이 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의 제작진이 선택한 이별의 방식은 그동안 사랑받았던 시리즈의 주요 등장인물들을 소환해 그들에게 충분한 작별의 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래리에게 별다른 주의도 없이 열쇠와 매뉴얼, 플래시만 주고 떠나버렸던 1편의 야간경비원들을 소환하는 것은 물론(할리우드의 노장배우 딕 반 다이크, 미키 루니, 빌 코브스가 1편에 이어 은퇴 생활을 즐기는 전직 경비원들로 출연한다. 미키 루니는 이 작품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편집자)이고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사랑받아온 원숭이 덱스터, 제레다야(오언 윌슨)와 옥타비우스(스티브 쿠건) 콤비, 테디 루스벨트(로빈 윌리엄스) 등의 인기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객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중에서도 엉겁결에 폼페이 화산 전시실에 갇히는 바람에 일생일대의 위협에 직면한 제레다야와 옥타비우스의 생존기는 큰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시작’은 3편에서 처음으로 합류한 이들의 차지다.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대영박물관과 영국적인 아이콘들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아서왕의 부하 란셀롯(댄 스티븐스)은 이번 영화에서 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주로 시대극에 몸담아왔던 기품 있는 이미지의 배우 댄 스티븐스(드라마 <다운튼 애비>)가 아름다운 금발을 헝클어뜨린 채 돈키호테처럼 칼을 휘두르는 장면은 3편의 볼거리 중 하나다. 하지만 가장 눈여겨봐야 할 캐릭터는 대영박물관의 야간경비원인 틸리(레벨 윌슨)다. 2편의 조나 힐처럼 카메오로 출연할 예정이었다가 그 존재감이 너무 강렬해 주요 조연으로 살아남은 이 호주 출신의 코미디언은 벤 스틸러가 1인2역으로 분한 네안데르탈인 ‘라’와의 로맨스를 선보이며 이번 영화에서 가장 자주 웃음을 주는 존재다.
이 영화가 선사하는 수많은 이별과 시작의 순간들을 통틀어 가장 애상적인 장면은 테디 루스벨트로 분한 로빈 윌리엄스가 등장하는 매 장면일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그의 역할은 웃음을 주기보다 래리의 박물관 친구들이 처한 위기를 대변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 그가 관객에게 이별을 고하는 순간은 로빈 윌리엄스라는 배우 개인이 맞이한 죽음의 순간(그는 지난해 8월11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을 떠올리게 하는, 슬픔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 예기치 못한 배우의 죽음이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맞이한 프랜차이즈영화에 가장 멋진 작별의 순간을 마련해준 것이다. 더불어 네덜란드 판화가 M. C. 에셔의 기하학적인 석판화 <상대성>(Relativity) 속으로 들어간 테디가 다른 등장인물과 황금 석판을 두고 추격전을 벌이는 대목은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다.
“이렇게 3편까지 만들어진 영화라면 예전과는 다른 일이 일어나야 하고 관객을 놀라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캐릭터들과 함께하며 관심을 쏟아준 관객에게 이전까지 보여줄 수 없었던 방법으로 보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3편의 촬영을 마친 뒤 벤 스틸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면 이번 영화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거라는 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대로, 시리즈의 문을 닫는 <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은 전편의 웃음과 추억,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여운을 꽤 만족스럽게 섞어놓은 영화다. 벤 스틸러에게 최고의 흥행 수익을 가져다줬던 <박물관이 살아있다2>의 기록을 깰 수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예측해볼 법한, 매력적인 상업영화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