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한국문화예술위(위원장 박명진) 기획 제작, 오태석 작 연출의 <태(胎)>를 관람했다.
오태석(1940~)은 충남 서천 출생으로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철학과 재학 시절 그의 첫 희곡 「영광」이 시민예술제 희곡 공모에 당선되어 국립극장 무대에서 공연되면서 연극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웨딩드레스」가 당선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초기에 서구의 모더니즘 희곡 형식을 실험하다가 1970년대 이후로는 전통극적 요소를 작품에 수용하면서 작가 고유의 희곡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오태석의 희곡은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다룬 부조리극 계열의 작품들과,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로 분류될 수 있다. 논리적인 인과 법칙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의 흐름에 따라 극적 서사를 전개시키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기발한 발상과 유희적인 상상력이 넘쳐흐른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비논리적이며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오태석은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고도 왕성한 극작 활동과 연출 활동을 전개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발표한 대부분의 작품이 관객으로부터 높은 호응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 현대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겸 연출가로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태석이 한국 현대 희곡역사에서 높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사실주의 희곡의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운 극 형식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오태석은 현재 목화레퍼토리 컴퍼니의 대표 겸 상임 연출가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육교 위의 유모차>,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교행>, <초분>, <태>, <춘풍의 처>, <사추기>, <자전거>, <부자유친>, <비닐하우스>,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백마강 달밤에>, <여우와 사랑을>, <천 년의 수인>, <코소보 그리고 유랑>, <잃어버린 강>, <지네와 지렁이>, <내 사랑 DMZ>,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 <만파식적>, <양화진 사랑>, <분장실> 그 외의 다수 작품을 발표 공연했다.
<태(胎)>는 태반이나 탯줄과 같이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조직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연극에서는 멸문지화를 당한 사욕신과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부인이 어떻게 임신한 아이를 살려 멸족을 면하게 되었는가를 극적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의 계유정난을 통하여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3공을 숙청하며 권력을 독차지한 후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일부 집현전 학사출신들이 단종을 다시 복위시킬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기다리던 중, 같은 집현전 출신인 김질이 세조에게 단종 복위 음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인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과 유성원, 박 쟁을 잡아들인다. 그러자 공조참의 이휘가 멸문지화가 두려워 스스로 관련되었다고 자백하고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과 권자신을 밀고한다. 이후 박팽년 문초과정에 김문기, 성승, 송석동, 윤영손,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이 추가된다. 그리고 성삼문과 권자신의 국문과정에서 단종 연루 사실이 나온다.
단종은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가문들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하고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의 노비 가 되게 된다. 이때 관련된 부녀들의 상당수는 대신들의 노비로 넘어갔다.
그런 과정에서 직계 후손을 피신시켜 살아남게 된 것은 박팽년과 하위지뿐으로 박팽년은 차남 박순의 아들 박일산, 하위지는 조카 중 하원이 하위지의 양자로 입적해 대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직계를 제외한 친족들은 10여 년을 노비로 살아가다가 세조가 승하하기 이틀 전에야 사면을 받아 원래 신분을 회복했다.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도 마찬가지로 세조의 사면으로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연극 <태(胎)>는 멸문지화를 당한 박팽년의 자부 이씨가 종의 부인과 출산한 자녀를 바꿔치기 함으로써 대를 잇게 되는 역정을 극적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무대는 천정에 수많은 백색 천이 드리워지고, 무대 양쪽에도 검은색 천이 드리워져 있다. 무대 상수 쪽 객석 가까이에 가야금, 피리, 아쟁, 장구 연주석이 마련되고 악사들의 연주로 극적분위기를 상승시킨다. 역사적 사실에 따른 극 내용이 펼쳐지면서, 출연진은 완벽한 호흡일치와 연기의 조화로 군무를 하듯, 단체 체조경기를 펼치듯 무대 전체를 골고루 누비며 약동하듯 열연과 호연을 보이며 극을 이끌어 간다.
우마차 달구지가 등장을 하고, 달구지에 사육신의 유골단지로 보이는 수많은 장독을 싣고, 그 위에 사육신의 수의를 덮으며 무대를 횡단하는 장관도 연출해 보인다. 갓 태어난 아기를 포대기에 싸 들고, 자신의 아기를 죽이면서까지 상전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하인내외의 보은은, 중국 작가 기군상(紀君祥)의 <조씨 고아(趙氏孤兒)>를 연상케 한다.
의상과 방갓이라든가, 단검 같은 소품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무대 바닥과 고공 전체를 고르게 연출해 낸 동선처리는 물론 한 치의 소홀함이 없는 오태석의 기량과 출연자들의 혼신의 열정이 무대 위에 제대로 드러나면, 마치 아름다운 꽃이 암흑 속에서 피어올라 무대를 광명천지로 바꾸는 느낌이고, 대단원에서 말년의 세조가 박 씨 손의 생존을 가납하는 장면에 이르면, 한 시간 넘도록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관람하던 관객이 비로소 긴장을 풀고 우레와 같은 갈채를 보내면서 연극은 감동의 마무리를 한다.
오현경, 정진각, 손병호, 성지루, 송영광, 김준범, 정지영, 윤민영, 유재연, 천승목, 조원준, 이준영, 김봉현, 배건일, 박지훈, 김유미, 조유진, 이신호, 이보다미, 김명준, 임주은, 김지혜, 장원준, 이병용, 최윤영, 이근환, 손현우 등 출연자 전원의 호연과 열연은, 군대보다 규율이 있고 사명감에 넘치는 오태석 사단, 극단 목화의 발전적인 장래를 예측케 한다.
무대의상 이승무, 조명 기술감독 이경천, 조명 오퍼 박혜민, 사진 이도희 신귀만, 컴퍼니 매니저 오준현, 기획 정지영 이병용, 안무 강은지, 악사 차다혜 김은경 문아람 김명준, 프로듀서 이혜정, 라인 프로듀서 이해인 이경빈, 홍보 김수정 박소영 양은지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기량이 조화를 이루어, 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박명진) 기획 제작의 원로연극제, 오태석 작 연출의 <태(胎)>를 기억에 길이 남을 걸작 연극으로 창출시켰다./뉴스프리존=박정기 문화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