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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민주 정부'가 아니라 '김진숙'이 희망이다..
문화

'야만적 민주 정부'가 아니라 '김진숙'이 희망이다

강응천 문사철 주간 기자 입력 2015/01/24 07:12
박노자 <비굴의 시대>

"거짓말부터 밝히자면 우리(한국 - 필자)는 민주화를 이룬 적이 없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단지 국가 운영 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 바꾸는 데 그쳤을 뿐이다."

"나는 남한과 북한의 지배자에 대해 공히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 북한이 국가로서의 체제를 유지하여 미국, 일본, 남한 같은 포식자로부터 독립을 지켜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미국이 체제 반대파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점부터 간파해야 한다. 미국은 비민주적인 자본 독재의 사회다."

 


대한민국에서 공개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자기 검열 없이 할 수 있는 지식인이 얼마나 있을까? 이 인용문들은 엄연한 한국인인 박노자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한겨레 블로그에 연재한 글들이다. 그는 최근 이 글들을 묶어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 2014년 12월 펴냄)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통쾌한 공감을 자아내고 어떤 이들에게는 격렬한 분노를 자아내는 글들이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인이라면 아무나 쓸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가 러시아에서 귀화한 '반쪽'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이전투구 할 필요 없이 오슬로대학에서 잘 먹고 잘사는 편한 처지라서 그런다는 '뒷담화'도 들린다. 그러나 그의 글을 정독해 보면 한국 역사에 대한 천착과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 만약 조금은 특별한 이력과 조건 때문에 그런 내공을 거침없이 표출할 수 있는 거라면, 나는 한국 사회에는 그런 이력과 조건을 갖춘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념적으로 대단히 편중된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그러나 경청할 만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기득권층, 김대중·노무현 정권, 왕년의 진보 투사 거침없이 비판…성역은 없다

 

ⓒ한겨레출판


  저 인용문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박노자는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1990년대 초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가이드를 할 때 수많은 '윤창중'을 거의 매일 보았던 경험을 토로하며, 보수 정권과 기득권 세력에 대한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그 비판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 이르러 격렬하게 폭발한다.

 

"인질범을 개혁할 수는 없다. 인질범을 아무리 교체해도 대다수를 인질로 잡는 체제가 그대로 있는 한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우리를 관리하는 이들이 국가라는 그럴싸한 간판을 건 범죄 집단임을 여실히 느꼈다.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죽고 싶지 않다면 인질범과 정면으로 맞장 뜨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보수 정권뿐이랴. 민주화마저 부정하는 논객답게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신자유주의에 굴종한 자유주의 보수 정권으로 폄하하는 것을 마다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은 2001년 2월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 파업 현장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등 노동자에 대한 각종 야만적인 행각을 주저 없이 저질렀다"라는 표현은 흡사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배포되는 가두 신문을 보는 듯하다.

 


민주화에 몸을 던졌던 왕년의 진보 투사들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다. "1980년대의 지도자급 인물은 그 고귀한 몸뚱이를 주요 정당에 비싸게 팔았다. 위치가 그리 높지 않았던 이념가는 교직으로 진출했고, 재벌 사회의 지식 관리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두뇌의 소출을 대중 교양서 시장에 내놓아야 했다." 이렇게 일갈하는 그 앞에서 한번쯤 움찔하지 않을 명망가가 과연 있을까 싶다.

 


이재오, 김문수 등 주류 정계에 합류해 저항을 마감한 인사들은 물론 노회찬, 심상정처럼 전향을 거부한 진보 정치인마저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돌아서 의회주의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 사민주의 노선을 밟는다는 것이 비판일 수 있느냐고, 그것도 좌파이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진보 노선 아니냐고 의문을 품을 독자도 있을 수 있다.

 


그에 대해 박노자는 대답한다. "예전에는 볼셰비키가 사민주의자를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했지만, 오늘날 유럽의 사민주의는 그 어떤 개량과도 무관한 신자유주의의 첨병 세력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좌파는 사민주의보다 더 왼쪽에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었다는 것이다. 그도 한때는 사민주의 우등생 노르웨이에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고백하지만, 지금은 그곳에서도 '일종의 전체주의적인 실체'를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좌파가 사민당과 연합하는 것은 '사민주의의 자장 안으로 포획되는 것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며 사민주의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고 있다.

 


최근 해산 선고를 받은 통합진보당 등 '좌파 민족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그 반제국주의적 열정은 평가한다. 하지만 오늘날 민족주의는 노동 계급의 단결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 '혁명가에게 애국은 없다'고 매몰차게 돌아선다. 박노자가 볼 때 "좌파 민족주의라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묘약은 노동운동의 급진화와 계급정당의 성장"뿐이다.

 


"사회주의적 정치 없이 사회 재건은 불가능하다"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한국의 주요 정치 세력에 대해 십자포화를 쏘아 대는 논객 박노자는 누구인가?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사회주의는 천연기념물에 가깝다. 그 역시도 "사회주의가 여전히 유효한 대안이라고 말하면 시대착오적이라고 반응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라며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어느새 우리에게 진보의 의미는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이로 국한된 것 같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거의 이단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신념을 토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선전 선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고국 러시아를 향해 외친다. 다시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는 것만이 민중의 살길이라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위기를 겪고 있지만 두 나라의 노동자가 "그들의 유일한 조국은 바로 미래의 소비에트공화국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라고 거침없이 일갈한다.

 


1990년대 이래 조롱과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린 소련과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그는 단서를 단다. "현실 사회주의는 분명 유토피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간이 나름대로 존엄과 긍지를 지키면서 비교적 평등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였음은 틀림없다"라고. 나아가 "우리가 정말 다원주의적으로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면 그만큼 스탈린주의자 마녀사냥을 그만두어야 한다"라는 발언을 보라. 요즘 세상에서는 웬만한 소신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사회 재건은 진보적인 정치, 즉 사회주의적 정치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며 흔들림 없는 소신을 과시한다. 그러나 이처럼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는 그의 마음은 사실 우울하다. '사회주의적 정치'라는 것은 의식화된 민중,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노동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눈앞에는 '노동자의 정치력이 어느 건설업 업주 조합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펼쳐져 있다.

 


그는 절규한다. "도대체 저항적 역사의 곡선은 왜 갈수록 아래로 처질까? 정권은 오히려 악랄해지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얌전해진 것일까?" 그리고 스스로 원인을 분석한다. "대한민국 인구의 90퍼센트는 중하급 월급쟁이이거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영세한 업자들이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각자 그 생존을 도모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한다." 이런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한국인의 다수는 서서히 몸이 망가져가는 비정규직의 절망적인 외침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보수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연대 의식은 점차 말라간다."

 


희망의 근거, 김진숙이 상징하는 불굴의 노동자 '동지'들

 


그래도 그는 연대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민중이 되지 못한 민초'들을 설득한다. "이 세상에 '남'이라는 것은 없다. (…) 일부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군중 동물이다.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으며, 타자와 소통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도 없다."

 


그리고 다짐한다. "우리가 보수화된 사회에서 산다고 해서 꼭 낙담해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낙토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 그러나 우리는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마음껏 외치고 힘껏 연대하면 된다. 사회는 보수화하더라도 진리는 그대로 진리다. (…) 나는 그냥 저들이 내 입을 힘으로 막을 때까지 그 진리를 크게 이야기할 생각이다."

 


이 같은 박노자의 다짐은 약간은 맥이 빠져 보인다. 대중이 움직이지 않는데 일개 좌파 지식인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 보니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은 종교인의 외로운 신앙 고백처럼 들릴 때가 많다. "초기 기독교인은 자신을 스스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보았다. 좌파 역시 애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이 세상에 이식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이다"라는 고백을 보라. 아무래도 이 목마른 지식인에게는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흥건히 젖고 싶은 민중의 바다가 절실해 보인다. 그것이 멀리서 윤곽이라도 보여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 같아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지식인 박노자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투쟁을 승리로 이끈 김진숙이 있고, 그녀가 상징하는 불굴의 노동자 '동지'들이 있다. 이 책에서 그가 김진숙에게 쏟아 붓는 찬사는 역사 속의 그 어떤 혁명가에게 바치는 헌사보다도 더 뜨겁다.

 


"사람이 죽어도 지워지지 않고 수만 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것은 김진숙이 보여준 것과 같은 동류 사랑, 이웃 사랑이다. (…) 노동운동판에서 김진숙이 보여준 실천은 그 어떤 종교인의 실천보다도 더 고귀해 보인다."

 


김진숙은 이 책의 제목이 <비굴의 시대>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갸웃거리게 만드는 존재이고, 박노자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실질적인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편집에 조금 의문이 있다. 내가 편집을 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순수한 독자로서 볼 때 글들의 배치가 조금은 달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박노자는 김진숙에 대해 '올드 레프트의 화려한 귀환'이라거나 이 정글 같은 나라에서 진정한 사람이 무엇인지 입체적으로 보여 주었다거나 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지식인들에게 그녀를 통해 인간 해방을 위한 지식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권고하기도 한다. 그리고 김진숙의 투쟁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며 옷깃을 여민다. 사실상 이 책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비굴의 시대>는 이 내용을 책의 중간 부분에서 '물질적 욕망의 질주, 사라진 노동의 꿈' 등의 제목 아래 다소 심드렁하게 배치했다. 아쉽다. 그냥 지나치기 쉽고, 희망의 메시지로 부각되기보다는 비탄의 메시지 속에 묻히기 쉬워 보인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배치할 내용이 아니라 저자가 신념과 의지를 다지는 마지막 부분에서 대미를 장식하도록 했어야 할 것 같다. 그랬을 때 꺼져 버리기 쉬운 지식인의 '신앙 고백'은 노동 현장의 생명력을 수혈 받아 희망의 메시지로 더 큰 울림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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