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대형 정책을 발표한 뒤 하루 만에 없던 일로 만들고, 청와대와 정부의 정책 추진 방향을 여당이 뒤집어서 소급적용하는 등의 혼선이 지난해 연말부터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4년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의 정책결정과정 투명성은 144개국가중 133위로 캄보디아보(130위) 보다 낮았다.
정치인에 대한 신뢰는 97위로 베트남(49위), 우간다(94위)보다 뒤처졌다.
◇대형 정책 발표 하루 전·후 '백지화'
현 정부의 정책 혼선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올해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하지만 불과 하루만에 핵심 내용에 해당하는 군인 및 사학연금 개편 계획을 '없던 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2월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공무원·군인·사학연금을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한 데 이어 정부가 10개월 만에 구체적 계획을 내놓았지만 하루 만에 뒤집은 것이다.
당시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관계 부처 간 협의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가 없이 군인·사학연금이 포함됐다"고 해명했다.
비난이 빗발치자 정홍원 국무총리는 "아무리 정책 취지가 좋더라도 부처 내 정책 판단이나 부처 간 조율 절차가 소홀히 되는 경우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정책 혼선은 지속됐다.
올해 들어 한 달 사이 연말정산, 주민세·자동차세 인상안, 건강보험료 개편안 등 굵직한 정책들이 잇따라 변경 또는 철회됐다.
연말정산을 두고 '세금 폭탄'이라는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정부·여당은 부랴부랴 재 정산과 소급적용, 소득세법 재개정을 약속했다.
이어 그동안 공들여 준비해온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안을 발표 하루 전에 백지화했고, 주민세·자동차세 인상안을 들고 나왔다가 곧바로 철회했다.
교육부는 대학입시 인성평가 반영을 강화하겠다고 했다가 꼬리를 내렸다.
◇당·정·청 '엇박자'…"모순된 공약 추진이 근본 문제"
이런 정책 혼선의 중심에는 여당과 정부, 청와대 간 엇박자가 있다.
정부가 군인·사학연금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가 하루만에 다시 거둬들인 배경에는 새누리당의 반발이 있었다.
공무원연금 개혁이 큰 진척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인·사학연금으로까지 손대기에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론이 부담스럽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새누리당 공무원연금 제도개혁 태스크포스 소속 김현숙 의원은 "당은 공무원연금 개혁에 주력할 것이며, 군인·사학연금은 전혀 검토된 바 없다"고 강조했다.
연말정산과 관련한 민심이 심상치 않자 청와대는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꾼 취지와 '적게 걷어서 적게 돌려주는' 방식을 국민에게 정확히 알리라고 정부에 당부했지만 표심을 우려한 새누리당이 '보완 후 소급적용'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와 관철시켰다.
정부의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안이 사실상 백지화되자 이번에는 새누리당이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권은희 새누리당 대변인은 "정부의 정책은 신중하고 소신이 있어야 하는데, 혹시 연말정산 문제로 인한 여론 악화를 의식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정책 혼선과 관련한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는 최근 종전의 국정기획수석을 정책조정수석으로 바꿨다.
청와대가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는 뒤늦은 조치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은 정책 혼선과 컨트롤타워 부재가 큰 국정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정책이 일관성이 있다는 믿음을 줘야 시장의 경제 주체들이 거기에 맞춰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는데, 기조가 흔들리면 경제주체들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꾸려고 로비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모순된 공약을 추진하는 것이 문제"라며 "증세를 인정하거나 복지를 거둬들여야 하는데, 둘 다 안 하려고 하니 결국 국민은 정부한테 속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해 7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취임한 직후에는 최 부총리가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 같았지만, 최근에는 그의 모습이 잘 안 보인다"며 최 부총리의 역할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