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우리가 살던 농촌은
정부는 2014년 9월 18일 쌀 관세율을 513퍼센트로 결정하고 같은 달 30일 세계무역기구에 해당 관세율을 통보하였다. 결국 우리 농산물의 마지막 보루였던 쌀까지 전면 개방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수입되는 쌀에 대해 513퍼센트라는 높은 관세율을 부과하였고, 이로 인해 관세가 부과된 수입 쌀은 국내 쌀보다 높은 가격에 팔릴 가능성이 높으므로 우리 쌀 생산 농가에는 큰 타격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정부에서 통보한 관세율 513퍼센트는 항구적인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수치다. 특히, 한국 정부가 중국과 FTA를 체결하고 다자 간 자유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Trans-Pacific Partnership)에도 가입 의사를 내비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 등 쌀 수출국들이 쌀 관세율을 낮추도록 한국을 압박할 것은 분명하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 밥상에 올라오는 쌀의 대부분이 수입 쌀일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현재 한국의 곡물자급률을 보면 쌀 관세화는 더욱 심각하게 다가온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 현재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23.1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는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 수준인데 참고로 스위스(205퍼센트), 독일(116퍼센트), 영국(100퍼센트) 등 다른 회원국들은 높은 곡물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의 호언장담과 달리 쌀 관세율이 하락할 경우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지금보다 훨씬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는 더 이상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식량 주권'마저 상실하고 농산물 수출국과 거대 곡물 회사에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맡기는 암울한 미래를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더불어, 우리 농촌은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청년들은 더 이상 농촌에 살지 않는다. 전체 농가 중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비율이 1970년 3.1퍼센트에서 2010년 현재 11.3퍼센트로 치솟았으며 향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농가 소득은 더욱 암울하다. 특히, 도시와 비교해볼 때 농촌의 상대적 빈곤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1995년 농가 소득은 도시 근로자 소득의 약 95퍼센트였으나 2012년에는 57.5퍼센트에 불과했다.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 농촌은 점점 더 가난해져가고 무관심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런 와중에 더 안타까운 것은 일반 시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에 쌀 관세화 때문에 몇 차례 소비자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정부가 추진하는 쌀 관세화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절차적으로 어떤 법적 하자가 있는지 등에 대해 소비자들에게 말씀드렸지만 생소한 통상 용어와 법률 용어로 인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농업 문제를 일반 소비자들에게 알릴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때마침 언론인 손석춘과 평생 농민이자 농민운동가인 김덕종의 대담을 책으로 엮은 <식량 주권 빼앗겨도 좋은가?>(철수와영희, 2014년 12월 펴냄)가 세상에 나왔다.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이슈를 일반 시민들이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기획된 '철수와 영희를 위한 대자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평생 농사꾼이 들려주는 농업·농촌 이야기
이 책은 주로 농업·농촌에 대하여 손석춘이 물어보고 김덕종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현재 우리 농촌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현실감 있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처음 부분에서는 정부의 쌀 관세화로 촉발된 한국의 식량 문제를 다루며 왜 '식량 주권'이 중요한지, 농산물 개방과 정부의 정책으로 어떻게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갔는지를 아주 간명하고 직관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책 마지막쯤에서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기초 농산물 국가 수매제' 나 '통일 농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방안은 결코 막연하지 않고 매우 구체적이다. 김덕종은 '기초 농산물 국가 수매제'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부가 수매를 하되 생산비를 보장하는 선에서 생산량의 30퍼센트를 수매하여 비축하고,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거나 폭락했을 때 원활한 수급 조절을 통해 농산물 시장을 안정시켜가자는 취지입니다. 이 제도가 도입이 되면 생산자인 농민은 품질 좋은 농산물을 만들어 적정한 가격에 공급하고, 소비자는 안전한 먹거리를 적당한 가격에 살 수 있는 상생하는 농업이 됩니다.
농산물이 상품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오로지 '시장'에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농산물이 상품으로서 가지는 독특한 경제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식량 주권 또는 안보의 측면에서도 안정적인 공급, 적당한 가격, 지속적인 소비의 선순환은 무엇보다 필요하다. 여기서 '보이는 손'인 국가가 작용하여 이러한 선순환을 유지시킨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김덕종이 언급하는 '기초 농산물 국가 수매제'는 농촌을 살리고,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소비하며 나아가 식량 주권을 지키는 디딤돌일 수 있다.
새마을운동 말고 농민운동
일반 시민들은 농촌 하면 무엇을 떠올릴까. 일단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기차나 버스에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논과 들의 풍경일 수 있다. 그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박제화되고 정적인 그것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나아가 우리에게 농촌 운동은 박정희 시대의 '잘살아보세'로 기억되는 새마을운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박제화된 농촌이나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농민운동을 이야기한다. 35년 동안 농사꾼이자 농민운동가로 살아온 김덕종은 진짜 농민운동을 이야기한다. 송아지 수입에 따른 소 값 폭락으로 함평에서 시작된 '소몰이 시위', 수입 고추로 가격이 폭락해 발생한 '고추 피해 보상 투쟁', 1990년 전농 창립의 밑거름이 되었던 '수세(水稅) 투쟁', 그리고 '한미FTA 반대 투쟁'까지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김덕종은 우리에게 이 나라의 농민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우리 농업과 농촌을 지키며 살아왔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점점 늙어가고 무기력해져가는 농촌 현실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그것에 맞서면서 농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농산물 최저 가격 보장을 위한 조례 제정 운동 같은 농민운동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가며 : 우리가 다시 살 농촌은
이 책은 김덕종의 지극히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머슴으로 시작하여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수성가한 농사꾼 아버지와 농사꾼이 되고 싶었던 친형인 고(故) 김남주 시인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김덕종은 김남주 시인의 '사랑은'이라는 시에 대한 일화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편지에 시와 함께 내용 설명을 쭉 해놨더라고요. 시골 노인이 집 뜰에다가 감나무를 심는다, 노인은 그 감 열매를 자기 때에 따먹기 위해서 심는 건 아니다, 멀리 두고 아들이나 손자들이 따먹도록 해주기 위해서다, 세상도 그렇다는 이야기죠.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싸우고 그러는 것도 결국은 다 그런 거 때문이다. 너 때 좋은 세상이 오겠느냐. 우리 후세들이 정말로 좋은 새 세상에서 살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시다"라고 설명을 곁들였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적이고 박제화된 농촌이 아닌, 진짜 살아 있는 농촌이 궁금해서 '토크 콘서트'에 가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