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 대신 집으로 직행했던 나는, 세상 모든 엄마들처럼 모유 수유에 애를 먹고 있었다. 유독 큰 소리로, 오래 지속됐던 아이 울음의 원인을 놓고 산후 조리를 도와주던 '이모님'도, 가끔 먹거리를 사들고 집에 오던 친정 엄마도, 나와 같이 발만 동동 굴렀던 남편도 나름의 분석과 해법을 내놓곤 했다. 많은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저런다"고 그랬다. 젖이 잘 나오지 않아서 애가 운다는 것이다. 그래도 '완모'를 하기 위해서는 분유량을 너무 늘리면 안 된다고 고집하는 내게 남편이 그랬다.
"회사 동료가 그러는데, 모유 수유를 고집하는 것도 엘리트 여성의 자기만족이래."
#. 돌도 지나, 어느 정도 길게 밤잠을 자던 아이가 어느 날 밤 유독 심하게 밤새 잠 못 들고 울었다. 안아주면 품에서 잠이 들었다가도 내려놓으면 다시 서럽게 울고. 차가운 밤거리를 아이를 안고 헤매다가, 들어오면 또 깨고. 아빠가 안아주면 싫다고 몸부림을 치며, 아이는 오직 나만 찾았다. 몇 시간쯤 이 짓을 반복했을까. 나는 폭발했다. 그때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을 기억한다. 경멸의 그 눈빛을 보면서도 그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말할 수 있었다.
"아이를 바닥에 내던지고 싶은 순간, 있었어? 지난 1년 반 동안, 나는 종종 있었어. 아빠에게는 없는 그 충동이 왜 엄마에게 있을까?"
#. 세상과 모든 연결 고리가 사라진 것 같은, 혼자 고립된 외딴 섬에 있는 것 같은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소통의 공간을 갈망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것도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야 가능했지만, 종종 나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일들과 내 감정을 적곤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가까운 사람이 어느 날 얘기해준 덕이었다.
"너 SNS에서 너무 징징대는 것 같아. 유난스러워 보일 때가 있더라."
#. 1년이 넘었던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에 복귀하던 날.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간 어린이집에서 아이는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나를 맞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아이를 안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엄마가 미안해." 아이는 조금씩 적응해갔지만, 내 죄의식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내 기분을 알아챈 어린이집 선생님이 말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이도 엄마가 자꾸 미안해하는 걸 알아요. 그리고 그 마음을 이용한답니다. 당당해지세요, 어머니."
"왜 아무도 나에게 엄마 노릇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을까?"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엄마의 탄생>(오월의봄, 2014년 11월 펴냄)을 보며 얼마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책 제목을 본 순간부터 호기심이 일었던 것도 이제 만 2년이 다 되어가는 '엄마 노릇'의 시간이 떠올라서였다. 노동사회학 연구자인 김보성, 여성학자 김향수, 여성에 대한 글을 주로 쓰는 작가 안미선. 이 세 사람이 쓴 <엄마의 탄생>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무도 지금의 엄마 노릇이 이렇다는 걸 설명해주지 않았지?"
내가 원했고, 아이가 찾아왔을 때 미친 듯 기뻤지만,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생존을 위해 버둥거리는 날들 속에 가장 많이 되뇌었던 질문도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왜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정확히 말하면, 한국이라는 이 사회에서 엄마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술적으로는 갓 세상에 태어난 이 연약한 존재를 어떻게 돌봐야하는지부터, 한고비를 넘으면 또 새롭게 등장하는 숙제에 정답은 있는지, 내가 겪고 있는 지금의 이 불안함과 우울감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각종 정보는 넘쳐나도, 모순된 주장을 펴기도 하는 그 정보들을 가려 보도록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그저 하루하루,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엄마의 탄생>은 나와 같은 엄마들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전하는 위로다. "누구도 그녀들의 짐을 나누어지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내가 '유별나서' 힘든 건 아니구나라는 공감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엄마의 탄생>은 아이를 낳고 50.2퍼센트가 향하는 것으로 조사된 산후조리원 이야기부터, 대부분의 엄마들이 겪는 산후 우울, "엄마들의 불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온갖 상품을 소비하게 부추기는" 거대한 육아용품 시장, 상업적 이벤트가 된 백일·돌잔치의 속 이야기, 유아기까지 내려온 조기교육 열풍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다룬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통해 저자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작은 생명체가 세상에 태어나 조금씩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엄마들에게 지워지는 '엄마 노릇'이라는 규정도 "세상이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은 바뀌며, '엄마'의 역할도 시대에 따라 변해간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엄마 노릇'이라고 믿는 것도 사실은 지난 세대의 유물이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만나 진화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것이다. (…) 아이를 키우며 갈등과 고민이 생겼을 때 "엄마니까", "그땐 다 그래. 조금만 견뎌봐라"라는 말 말고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어디까지가 '엄마 노릇'이란 말인가?
"엄마가 무슨 원풀 빨래방도 아니고…엄마들은 죽어라 해도 항상 죄인이야"
"임신과 출산은 그 의례적 의미만 강조될 뿐 한 여성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경험인지 잘 언급되지 않는" 사회에서, 이 책은 여러 엄마들을 만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끌어냄으로써 그 의미를 찾아간다.
엄마 혼자서 아이를 보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 몸이 힘들어지면서부터 마음이 많이 흔들렸어요. 물론 아이는 엄마의 전적인 도움이 필요하지만 엄마로서는 나를 제쳐놓고 아이만을 위해 살기가 쉽지 않았어요. 아이는 소중하지만 아이 때문에 내가 없어지는 기분이 드니까 상실감이 컸죠. 남편이 조금 일찍 온다거나 대가족이라서 누군가 화장실 갈 때 잠시 안아주고 밥 먹을 때 잠시 봐주는 작은 도움만 있어도 그런 기분이 좀 덜할 거 같은데, 혼자 완전히 고립돼 있잖아요. 이것도 내 인생인데 싶지만 그대로 '나'는 아닌 거잖아요. 내 아이가 나는 아니고. '남편도 같이 해야 하는데 왜 나만?' 이런 억울함도 되게 컸던 거 같아요, 진짜. (윤소정)
엄마가 원풀 빨래방도 아니고 24시간, 365일 이렇게 풀가동하는 거를 처음 경험했어요. 육아책에 보면 '만 3세까지는 반드시 엄마가 책임지고 키워야 한다' 그러잖아요. 그거에 대한 압박도 있었어요. (…) 남편이 직장에서 일도 하면서 노동조합 활동도 하느라 늘 바빴어요. 나는 같이 양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인 거예요. 난 한 번도 죽을 생각 안 했는데, 남편과 소통되는 느낌은 없고 나는 애를 키워야 하고. 그때 "나 정말 죽고 싶다"고 처음으로 남편한테 말했어요. "나한테 정말 필요한 사람은 너인데, 너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 "난 죽고 싶다"고. (김지혜)
나도 그랬다. 같이 낳은 아이인데, 왜 아이 양육은 엄마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지워지는 것일까? 아무리 달래도 달래지지 않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순간에도, 안고 있어야만 낮잠을 자는 아이를 아기띠에 안은 채 몇 시간씩 좁은 집 안을 서성이던 순간에도, 열이 펄펄 끓어 응급실까지 갔는데 나와 아이를 두고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던 순간에도.
그런 불만을 대놓고 토로하기도 어려웠다. "다른 남편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사람들의 평가 앞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곤 했다. 사람들은 모두 "아빠는 못 하는 영역이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교육받은 여성의 수가 늘어나고 20대 여성의 취업률도 높지만 결혼 후 양육은 전적으로 엄마의 역할이며, 엄마가 오롯이 키워야 아이가 잘 큰다는 신화는 건재하다.
그 신화는 "옛날에는 애 여럿 낳고 키웠는데 요즘 젊은 엄마들은 하나 키우며 유난을 떤다"는 말로, "지 새끼 보는 게 뭐 어려워? 애 보는 게 대수냐"는 편견은 "아무도 내 노고에 대해서 인정해주지 않는 인색함"으로 이어진다. 그저 "힘든 걸 인정받고 싶었던 것"(윤소정)뿐인데,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내가 문제구나' 수긍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엄마들은 죽어라고 해도 항상 죄인이야. 남자들은 돈 벌어주면 땡인데 여자들은 뭘 해도 애한테 죄인이야. 정말 쉬지 못하고 일해도 정서적으로 못해주면 그것도 죄고. 상담을 받으면 결론이 엄마가 잘해야 한다는 거예요. 초인적인 힘을 내서. 다 개인 책임으로 돌아가는 거지. (…) 다 엄마 책임이야. 난 이게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봐. (조미경)
모든 것을 엄마 책임으로 돌리는 시선들에 저항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스스로 그 책임이라는 틀에 갇혀 자신의 모자람을 저 혼자 비난하다 보면,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성 수행의 재생산 영역은 생산 영역과 분리된 것으로 여겨져 낮게 평가되고 권리가 주장되지도 않는다. 성별 분업화된 가정에 머무르게 된 여성은 소외를 경험한다. 제도화된 성별 분업 현실을 실감하고 충격을 받는 시기가 산후의 시간이며 그 성별 분업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이 산후 우울증의 시간이 주는 교훈이다.
옛날 엄마들에게는 없었다는 '산후 우울증'이 의미하는 것은 "여성이 처한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이며 "부당하게 고립되고 사회적으로 잊힌 여성이 자신을 찾고 싶어 하는 막다른 몸짓"이지, 부족한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질병이 아니란 얘기다. 하루아침에 부모가 된 것은 남성도 마찬가지인데, 아빠에게는 이런 우울증이 찾아오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다.
근대적 교육을 받고 자아의 연속적인 느낌을 간직하고 싶어 하며 자신의 노동을 인정받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 출산과 더불어 맞닥뜨리는 사회적 지원의 부재와 소통의 단절, 고립과 절망이 이른바 산후 우울증을 일으키는 주범이다.
'좋은 엄마' 요구하는 사회,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됐다는 외로움, 나는 사라지고 아이를 위한 '엄마'만 남았다는 생각만이 우울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좋은 엄마'란 아이 배만 부르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 사회가 엄마들의 죄책감을 부추긴다.
이 "비현실적인 모성 수행"에 대한 기대는 엉뚱하게 튄다. 적게는 1조7000억 원, 많게는 27조 원으로 추정되는 유아용품 시장의 규모만 키워준다. 과학의 발달은 이런 유아용품 시장의 비대화를 부추긴다. 아이 성장 속도와 시기에 따라 세분화된 유아용품은 "'과학의 언어'로 상품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과학의 권위'로 제품을 판매"한다.
아이를 너무 울게 하면 우울증, 불안 장애, 공포 발작, 스트레스 관련 질병에 걸릴 수 있고. 알레르기 유발 식품을 처음 먹일 때 조심하지 않으면 평생 알레르기에 시달릴 수 있고, TV를 너무 큰 소리로 틀어놓으면 소음성 난청에 빠질 수 있다는 지식들. 아이 발달에 맞는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지 않으면 치러야 하는 대가들이 너무 클 것이라는 불안감. 엄마들의 이 불안은 상품 구매로 이어진다. 아기가 잘못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은 엄마 노동을 더 힘겹게 만든다.
'좋은 엄마'에 대한 요구로 득을 보는 것은 엉뚱하게도 기업인 셈이다. 또 내가 아이를 '전문적'으로 키우고 있는 것일까를 끊임없이 회의하도록 만드는 사회는 "여성들이 아이를 존재 그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고 개선해야 할 불완전한 존재, 엄마가 노력하면 바뀔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게 만들어, 아이와의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아이가 조금 자라면, 이런 압박감은 조기교육에 대한 엄마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유아 사교육 시장에 대한 국가 통계는 2012년에서야 처음 발표됐고, "전문가들은 조기교육 효과가 입증된 바 없으며, 조기교육을 빙자한 '엄마들의 취미 활동'일 뿐이라고 경고"하지만, 내 아이가 경쟁에 뒤처질까 두려워하는 엄마들은 그 유혹에서 버티기가 힘들다. "엄마의 역할은 잘게잘게 쪼개져 시장의, 이른바 전문가들의 손에 넘어간" 사회에서, "자녀 교육에 소신 있는 엄마는 무심하고 부족한 엄마"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커가면 성적으로 (엄마들이) 서로를 평가하지. '저 엄마는 정말 모성애가 강한 엄마야. 저 엄마는 애를 내팽개치고 자기만 살려는 사람이야.' (이채원)
전업주부도 스스로 끊임없이 자책하며 남모르는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런 류의 비난은 워킹맘에게 더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아이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항상 마음에 짐이 되었다. 아이에게 '충분한' 보살핌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이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인가?'라는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일을 손에서 놓겠다는 결심도 서질 않았다. 그저 안절부절못하며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김보성)
심리학에서 애착이 중요하다 하는데 워킹맘으로서는 그 말이 아킬레스건 같은 거예요. 전 퇴근하고 나서 먼저 애를 들여다보고 예뻐해줬지만 생각해보면 절대적으로 함께 보낼 시간이 적었던 것 같아요. (…) '엄마가 행복해야 애가 행복하다'고 하는데 그걸 무슨 공식처럼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것도 억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애가 갖고 있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게 해결되지 않고 나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행복할 엄마는 없어요. (김연수)
"언제나 아이의 요구에 응하는 풀타임 엄마인 동시에 언제나 기업의 요구에 응하는 풀타임 노동자여야 하는" 워킹맘들을 위해,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그러나 사회가 언제 변할지는 시간표조차 알 수가 없고, 당장 우리는 어쨌거나 엄마로 오늘도 내일도 살아야 한다. 이 땅 엄마들이 딛고 있는 현실을 <엄마의 탄생>으로 적나라하게 보고 나니, 어쩐지 더 기운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희진 씨의 말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내가 이미 했던 것보다는 아직도 못한 것들을 자꾸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 안 그러는 엄마들이 거의 없는 것 같고. 엄마들 중에 '나는 정말 너무 잘했어. 나는 잘하고 살아. 난 충분히 잘했어' 이러고 사는 엄마들이 있을까? 별로 없을 것 같아. (박희진)
그래,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적어도 내 딸은, 나 같은 '엄마 노릇'을 강요받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나는 잘하고 있어'라고 믿으며 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