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실제로 위험한 내란 합의 있어야 내란음모죄 성립”
ㆍ헌재 진보당 해산·검찰 RO 인사 수사 근거 약해져
대법원이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와 그가 주도했다는 모임 ‘RO(혁명조직)’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헌법재판소의 진보당 해산 결정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형사소송법으로 다뤘고 헌재는 정당해산심판을 민사소송법을 준용해 접근했기에 하나의 잣대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사실관계를 다루는 대법원의 판단 후에 헌재가 진보당 해산 문제를 결정했어야 한다”는 지적하고 있다. RO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면서 강력한 공안수사 의지를 천명한 검찰의 발걸음은 무거워지게 됐다.
■ 대법·헌재 판단 상충
대법원은 이 전 의원 등의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면서 “RO는 사건 제보자의 추측에 불과하다. 강령, 목적, 지휘 통솔체계 등을 갖춘 조직이 존재하고 회합 참석자들이 그 구성원이라는 점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헌재의 판단과 충돌한다. 헌재는 표면적으로는 RO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석기 주도 아래 전쟁 발발 시 북한에 동조해 국가기간시설 파괴, 무기 제조 및 탈취, 통신 교란 등 폭력수단을 실행하고자 회합을 개최했다”면서 참석자들을 ‘경기동부연합과 이석기 등 주도세력’이라고 표현했다. RO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았지만 ‘주도세력’이 ‘회합’을 통해 ‘시설 파괴’ 등 목적을 실행하려 했다고 본 것이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는 ‘주도세력’ 등의 표현으로 사실상 RO의 실체적 위험을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이 조직의 실체를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어서 상충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사실관계 인정을 다루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헌재가 이를 감안해 본연의 규범적 판단을 내렸어야 맞다”고 말했다. 정당해산 심판에서 진보당 측을 대리했던 이광철 변호사는 “한국 최고 법원에서 하나의 사실관계를 두고 서로 다른 판단이 나왔다는 자체가 모순”이라며 “헌재가 막연한 편견을 갖고 내린 판단 탓에 (해산 결정이란) 참사를 빚었다”고 말했다.
■ 내란음모·선동 성립기준 첫 설정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내란음모, 내란선동의 구체적 성립기준을 세운 대법원 최초의 판결이다. 대법원은 내란선동은 내란실행을 목표로 내란행위를 결의하고 실행하도록 격려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고 밝혔다. 반면 내란음모는 2인 이상 모임에서 범죄실행을 합의한 상태를 뜻한다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이 전 의원의 내란선동 혐의를 유죄로 판결하면서 “비록 이 전 의원 등의 발언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해도, 회합 참석자들에게 특정 정세를 전쟁 상황으로 인식하고 가까운 장래에 구체적 내란의 결의를 유발하거나 증대시킬 ‘위험성’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반면 3명의 대법관은 “선동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고 전쟁 상황을 전제로 한 국지적, 산발적 파괴행위일 뿐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위력 있는 폭동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반대했다.
다수 대법관은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면서 “1회 토론의 정도를 넘어 내란의 ‘실행행위’로 나아가겠다는 확정적인 의사의 합치에 이르렀다고 보긴 어렵다”고 판시했다. 반면 4명의 대법관은 “확정적인 의사의 합치에 이르지 못하고 논의를 하는 데 그쳐 합의의 구체성이 다소 떨어지는 경우라도 실질적 위험성이 있는 내란실행에 관한 합의”라는 견해를 밝혔다.
■ 대대적인 공안수사 일단 제동
법무부는 지난 21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면서 진보당 해산 후속조치를 철저히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RO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다음날 대법원이 진보당원 13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RO의 실체를 부정하고 내란음모 혐의도 무죄 판결하면서 이들을 수사할 근거가 약해졌다. 검찰의 내란음모죄 적용이 무리했다는 비판이 불거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