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바치신 민족 시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72주기 를 맞은 날이다.
[서울,뉴스프리존=안데레사 기자]우리군은 29일 오전 10시 서울시 성북구 심우장에서 실시할 만해 한용운 선생 72주기 추모제에 참석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바치신 한용운 선생의 넋을 기리는 뜻 깊은 행사에 참여했다. 이번 행사에는 72주기 다례 봉행 외에도 창작 및 퓨전 음악공연, 시낭송,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제로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1878년 태생인 한용운 선생은 1905년 출가하여 '용운'(龍雲)이르는 법명과 만해(萬海)라는 법호를 받고 세상에 등장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한용운 선생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된다. 당시 함께 복역을 선고받은 민족대표들은 '사형'당하거나 최소 '무기징역'으로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에 휩싸인 상태였다.
이때 한용운 선생은 역한 냄새가 나는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는 "나라 잃고 죽는 게 무엇이 슬프냐?"면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이들이 이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 취소하라"고 윽박질렀다.
한편 한용윤 선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른 승려들과 여행하던 당시, 한무리의 조선 청년들에게서 '친일파 중'으로 오인당해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대처가 그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청년들이 끝까지 친일파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자 "나를 죽여도 개의치 않겠으나, 이국의 바닷물에 던지지 말고 조국 땅에 묻어라"고 강하게 얘기했다. 그제야 청년들은 친일파가 아님을 알고 사과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1926년 3년 복역 후 출소한 한용운 선생은 역사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한용운 선생은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 불교잡지까지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일생을 살던 한용운 선생은 나라가 없는 현실을 괴로워하다 광복 1년 전인 1994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한용운 선생의 72주기를 맞아 홍성군은 28 ~ 29일 이틀간 만해 한용운선생 생가지에서 『문화 in』, 충청남도작가회, 만해문예학교에서 공동 주관한 제2회 한용운 문학캠프를 실시하며 1일차 ▲신경림 시인 초청강연을 통한‘만해 한용운의 문학세계와 정신 이해', ▲만해아리랑 제작 발표 및 시 노래 공연과 2일차 한용운 선생의 입적 72주기 추모다례를 끝으로 문학캠프는 종료된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한용운 선생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된다. 당시 함께 복역을 선고받은 민족대표들은 '사형'당하거나 최소 '무기징역'으로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에 휩싸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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