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이르러 글을 쓰면서 독특한 습관이 몸에 붙었다. 그건 일주일에 3회 정도는 일찍 기상하여 인근에 올림픽공원을 산책을 하면서 글을 일목요연하게 쓰기위한 영감(靈感)을 얻기위해 무작정 길을 걷는다.
욕조에서 유레카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처럼 길을 걷다보면 길거리의 잡초 한포기에서도 쓰고자 했던 글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조용하게 걷다보면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도움이 된다. 글을 써보시는 분들은 공감하리라 믿는다. 과거에 미당 서정주 선생은 시상(詩想)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러시아로 여행을 떠난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난다.
세계에서 가장긴 시베리아 횡단 열차타고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인 바이칼호수의 자작나무와 소나무등 야생의 원시림으로 끊없이 펼쳐진 침엽수림을 보면서 바다같은 호수의 광활함에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의 매력에 흠벅 도취되어 좋은 글귀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그래서일까! 러시아는 도스토 예프스키, 푸시킨, 톨스토이 등 세계적인 문호들이 탄생하지 않았었나! 하는 짧은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그러면 이번주 복싱비화를 시작해보자. 지난 5월초 예산에서 벌어진 프로복싱 경기를 참관 하던중 반가운 전직복서를 만났다.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기억에서 잊혀진 전 WBA 플라이급 세계랭킹 2위 였던 임성태(72년 부여)였다.
다소곳이 인사를 하는데 반가움과 아쉬움 교차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임성태 그를 보자 문득 조용필의 히트곡 상처라는 곡이 떠올랐다.
상처라는 곡은 조용필 앨범에서 허공 바람이 전하는말 그겨울에 찻집 킬로만자로의 표범 등에 함께 묻혀 수록된 곡으로 조용필이 기억 못하는 곡 이였듯이 임성태도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최요삼, 지인진 등 세계챔피언들의 화려한 케리어에 묻혀 나의 기억속에 잊혀진 복서였기 때문이다.
임성태, 그는 89년 88프로모션에서 초년병 트레이너 생활할 때 체육관 숙소에서 같이 생활하며 나의 지도를 받았던 복서였기에 여느 복서보다 친밀감과 정감이 묻어있던 선수였다.
그는 91년 1월 프로에 데뷔하여 19연승(2무포함)을 달리다 96년 돌연 은퇴한다. 그는 내가 지도한 숱한 선수중 복싱 감각과 스킬이 가장 뛰어난 복서였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복싱계 안젤로 던디라 불리던 최고의 트레이너중 한분이 이영래 사범이 제2의 짱구 장정구라 말하며 차세대 세계챔피언 1순위로 꼽은 특급 유망주가 임성태였다.
그는 다소 부족한 파괴력을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반사 신경과 센스 스피드 등으로 커버했던 전형적인 테크니선으로 후에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는 최요삼 지인진 보다 한 단계 높은 복싱을 구사했던 에이스였다.
공교롭게도 임성태를 비롯해서 지인진 최요삼 이들 3총사들의 프로 데뷔전을 내가 트레이닝을 담당하며, 지도했던 인연이 있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지난 날을 반추시켜보면 난 선수를 잘 만난 참으로 운이 좋은 지도자란 생각이 든다.
율곡선생의 저서 격몽요결에 나오는 '썪은 나무로는 조각 할수 없다'는 글귀처럼 나는 좋은 원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고, 그원석 들을 잘 다듬어진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해왔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임성태도 그중 스쳐간 복서들 중 한 명의 유망주였던 것이다.
그가 4전 전승을 기록한 후 맞이한 92년도 전국신인왕전이 91년 11월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다. 나는 임성태 · 지인진 두 에이스를 를 데리고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임성태는 라이트 플라이급으로 지인진은 슈퍼 플라이급으로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두선수가 체급별 우승은 물론이고 내심 장원급제 까지 노리고 있었다. 두 선수는 그런 능력과 역량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임성태는 경기를 앞두고 담배를 피우다 나에게 발각 되자 다음날 곧바로 증발(?)해 버리면서 그와 나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또한 인진이도 1회전에서 박태선에게 두차례 다운을 당하면서 패해 탈락하면서 허망하게 끝난 신인왕전이 되어버렸다. 장원급제는 커녕 단 한체급의 우승도 쟁취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끝난 92년 신인왕전이 되어 버렸다. 후에 WBC 투타임 페더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인진이에 대한 숨은 비화는 추후 상세히 기술할 것을 약속한다.
임성태는 이후 원소속팀인 평택의 청담 체육관으로 복귀 해서 1년후 93년 신인왕전에 다시 출격 결승에서 코리아체육관 조용인을 맞이하여 한수위의 기량으로 판정승을 거두고 플라이급에서 우승한다. 그가 결승에서 상대한 복서 조용인은 후에 슈퍼 밴텀급에서 두차례나 원정경기를 통해 동양챔피언에 등극한 복서로 다크호스였다.
이후 임성태는 94년 안용진을 7회 ko승을 거두면서 국내 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르고 세계랭킹에도 진입한후 국제경기에서 5연승(1무포함)을 거두지만 기량의 정체현상을 보인다. 구슬도 닦아야 빛이나고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그는 아쉽게도 역량있는 조력자와 후원자들의 지원이 총체적으로 부실해 전력투구 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세계타이틀전과 요원한 경기는 실체없는 새도우 복싱이란 생각이들자 96년 가을 복싱을 접는다. 그때 그의 나이 만24세였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데 하늘을 볼 수 없는 척박한 현실이 그의 은퇴를 앞당겼지만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한편 요삼이는 94년 신인왕에 등극한 후 95년 국내 챔피언에 96년 동양챔피언에 이어 99년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오르며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고 타이틀을 상실한 이후에도 두차례나 더 세계타이틀에 도전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지인진 역시 데뷔전 패배 이후 기록적인 29연승을 올린후 2001년 모랄레스에게 첫 타이틀전에서 퇴각한후 2004년과 2006년 WBC 페더급 챔피언에 두차례나 챔피언에 등극하면서 임성태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성태와 요삼이는 내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95년 10월 천안에서 체육관을 개관할 때 모두 참석해 공개 스파링을 치러준 고마운 복서들이다.
임성태에겐 아쉬운 구석이 하나있다. 그는 정말 빨랐던 복서였다. 하지만 포기도 정말 빨랐다. 바위 위에 3년이란 일본속담이 있다. 세상 어떤 일이든 꾸준히 해낸 사람은 알아줘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런 축척의 힘을 보유한 사람들을 고수라 추앙한다.
'고수는 강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다.'라는 말이있다. 임성태의 복싱비화를 쓰면서 문득 떠오른 짧은 생각이다. 최요삼 지인진 두 복서는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로 거듭 태어났지만 임성태는 바늘 구멍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것이다.
좋은기억이든 그렇지않은 기억이든 세월이 흘러가면 추억이란 이파리로 남아 가슴에 스며든다. 그속에서 교훈을 찿고 반면 교사로 삼아야한다. 왜냐면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