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심영자 회장의 희수연에 참석한 복서 출신 중 유난히 허준이란 복서에 눈길이 쏠렸다.
동의보감을 쓴 명의(名醫)허준이 아닌 복서 출신 의인(義人) 허준이었다. 그를 바라보면 지난 발자취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연예계에서 의리하면 김보성을 떠올리지만 복서 허준은 한 차원 높은 진정한 의리의 진수를 보여준 상남자다.
88년 8월 목동에서 일어난 화재사고 현장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13명의 소중한 생명을 구출하고 자신은 맨마지막으로 투신 간신히 목슴을 건진 허준을 지하철 의인 이수현님과 비견될 정도로 의협심 넘치는 열혈남아다. 오늘의 복싱 비화 주인공 허준 그는 80년대 한국 프로복싱의 최고 유망주였다.
67년 충남 공주 출신으로 마도로스 출신의 부친의 모험심을 닮은 그는 아동기 시절 부터 카레이스와 오토바이 경기를 즐기면서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던 자란 배짱좋은 아이였다. 그는 6살 때인 70년대 초반 변웅전씨가 진행하는 묘기대행진에 출연, 그의 숨은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자 방청석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보여줬다.
준이는 초등학교 3학년때 미아리에 있는 준호복싱 짐에서 김준호 선생의 지도로 복싱을 수련한다. 김준호 선생은 서강일, 홍수환, 염동균, 김태식, 이승훈 등 역대급 복서들을 조련한 대한민국 트레이너 중 첫 손에 꼽히는 명장이었다. 이후 84년 프로에 데뷔한 준이는 그해 12월 강승엽(65년 원진체)을 1회 KO승을 거두고, 제14회 MBC 신인왕전(LF급)에서 최우수복서로 선정된다. 9전 전승 (6KO승)을 기록한 준이는 174cm의 큰 키에서 죽창처럼 찌르는 스트레이트 위력이 메가톤급이였다. 85년 2월 나는 문화체육관에서 허준의 경기를 직관할 기회가 있었다.
상대는 향후 WBA 미니멈급 챔피언에 오르는 한국 화장품의 김봉준(64년 완도)이였다. 당시 김봉준은 9전 6승 2무 1패를 기록한 체력이 좋은 파이터 였기에 접전이 예상되었다. 왜냐하면 김봉준은 장경재(63년 부산)에겐 판정으로 패한 전력이 있지만 3개월전 후에 동양챔피언에 등극하는 정병관(64년 부안)과 무승부를 기록할 정도로 호락 호락한 복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그때 그경기를 보면서 받은 촌평을 하자면 소총으로 무장한 김봉준이 득달같이 달려들자 이에 맞선 허준이 박격포 한방을 명중시키자 김봉준이 백기를 들면서 3회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경기였다. 3살 어린 후배에게 KO패 당한 김봉준은 13개월 후 일본에 원정 WBC 스트로급 챔피언에 오른 오하시 히데유끼를 잡고 재기에 성공한 후 89년 세계정상에 올라 5차 방어에 성공한다. 허준에게 당한 KO패가 성장통으로 작용한 것이다.
한편 13전 전승(8KO승)을 기록한 준이는 85년 9월 88체육관의 박조운(66년 영광)을 상대로 한국타이틀에 도전, 한 차례 다운을 뺏었지만 근소한 차의 판정에 고개를 숙인다. 와신상담한 3개월 후 준이는 국가대표 출신으로 국제대회 3관왕의 금자탑을 쌓은 박제석(63년 화성)을 군말없는 판정으로 잡으며 도약을 준비한다. 이후 IBF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르는 롤란드.볼을 판정으로 잡은 준이는 김희석, 차용만, 박윤호, 박대룡을 상대로 4연속 KO 퍼레이드를 펼친다.
속된 말로 주먹에 물이 오른 것이다. 87년 12월 강기열을 잡고 동양챔피언에 오른 어니 카타루나를 상대로 대차의 판정으로 잡으며, OPBF 밴텀급챔피언에 오른다. 카타루나는 84년 12월 WBA 밴텀급 챔피언을 지낸 박찬영과 맞대결을 펼쳐 2차례 다운을 뺏고도 석패한 수준급 기량을 지닌 필리핀 복서였기에 허준의 기량이 돋보인 한판이었다.
88년 3월 1차 방어전에서 5회 KO승을 거둔 허준은 8월 21일 민영천과 타이틀 2차 방어전을 5일 앞두고 있었다. 훈련을 마친 후 그날 7시쯤 묵동 3거리 4층에 위치한 골드체육관에 체중을 체크하러 올라갔을 때 13명의 관원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 허준의 운명을 가른 대형사고가 터진다.
1층 가구점에서 화재가 발생해 불길이 치솟으며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번진 것이다. 허준은 위급할 때 일수록 침착해야 됨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제일 먼저 그의 사범 김택구의 아들인 김종식(당시 5세)을 보듬고,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조대원에게 전달(?)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관원들이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빠져 나간걸 확인한 후 4층에서 몸을 던졌다. 아래는 매트레스가 깔려 있었지만 절체절명의 순간 박원관 군에게 양보하고 그는 맨땅을 향해 몸을 던졌다. 마치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마지막 남은 구명 보트를 양보한 노신사 구겐하임처럼 그는 의연했다. 준이는 결국 그날 화재사고로 양쪽 발꿈치의 뼈가 산산조각 나면서 선수생활 끝이라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당시 담당 의사인 신규호 백병원 정형외과장은 "완치가 되더라도 선수로서는 절대 재기불능이고 정상인으로도 행동에 제약을 받는 부자연스러움이 따를 것"이라고 전문의로서의 소견을 첨부했다. 세계챔피언 1순위 후보로써 왕좌 대관식(戴冠式)만 남아있던 준이에게는 맑게 갠 하늘에서 날벼락이 친다는 뜻의 '청천벽력(靑天霹靂)' 바로 그 자체였다.
언제 완치될지 모르는 암담한 현실속에 어느날 그는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고 부터 준이는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밤이 되면 끊어지는 통증이 찾아왔고, 한 여름에 깁스를 한 발에는 통증보다 더한 가려움이 밀려왔다. 그는 4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으면서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이미 심신은 지쳐있었다.
당시 그는 "필이엄마(사고 당시 임신 7개월의 아내)가 아니였으면 나는 병원 7층 건물에서 뛰어내렸을 거다"라고 말하며, 온갖 시중을 들면서 불평없이 거들고 있는 필이 엄마를 생각하면 "이래선 안되지"하는 희망의 싹이 생겼다고 회고한다. 그는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던 원동력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필이엄마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말했다. 결국 준이는 부상을 극복하며 19개월만에 극적으로 링에 오른다.
복귀전의 상대는 이은식(부산광명) 이었다. 그는 91초만에 KO패 당한다. 당시 기자 인터뷰에서 허준은 "내가 실력으로 패한겁니다" 그게 끝이었다. 91년 2월 준이는 루벤 파라시오스와 세계랭킹전에서 2회 KO승을 거두며, 세계랭킹에 진입한 후 91년 8월 숙원이던 WBC슈퍼 슈퍼 밴텀급 세계타이틀에 도전한다.
기름통을 짊어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무모한 도전이라는 것을 준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파이트머니도 필요 없었다. 오직 한 번 세계정상을 도전했다는 증표를 남기고 싶었다. 일방적으로 난타당한 끝에 도전에 실패하자 미련없이 복싱을 접었다. 준이는 그런 남자였다.
그는 31전 28승(20KO승)3패를 남기고 링을 떠난다. 준이는 부상의 여파만 피해 갔다면 국내에서 최초로 3체급 세계챔피언의 꿈을 실현시킬 최고의 히든카드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식견있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회고 할 정도로 잠재력이 풍부한 복서였기에 아쉬움은 배가된다.
허준은 현재 장한평에 있는 하나로 자동차상사에서 이주홍 선배와 함께 사업을 하며, 지난 날의 추억을 묻고 산업전선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훗날 그를 새롭게 기억할 것이다.
여느 세계챔피언 보다도 훌륭한 이정표를 남긴 복서 허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