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논쟁의 대상이 되는 주제가 있다. 진화가 그렇다. 일단 지적 설계론자에게 지속해서 공격을 받는다. 일군의 학자들이 참다가 발끈해 맹렬하게 역공을 편다. 지켜보는 처지에서 신난다.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게 어디 있던가. 더욱이 무력을 동반한 싸움이 아니라 오로지 논리에 기댄 싸움만큼 흥미로운 건 없다.
또 있다. 진화를 인정하는 학자끼리 싸운다. 적전 분열인가? 그렇지는 않다. 진화를 확고하게 받아들이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티격태격한다. 자존심 대결의 흔적도 보인다. 인신공격도 삼가지 않는 분위기라 그렇다.
어설프게 관전한 소감을 말하자면, 한쪽은 자꾸 결정론으로 흐른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많은 쟁점을 유전자 수준으로 환원해서 단칼에 해결하려고 한다. 더 수학적이고 더 실증적 근거가 풍부하고 더 세련되어 보이고 더 많은 학자가 이쪽 진영에 포진해 있는 듯싶다.
다른 진영은 과학의 독립성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사회적 맥락에서 파악하려 한다는 비난을 듣는다. 결정론이 품고 있는 보수적이고 패권적인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더 이론적이고 더 냉소적이고 더 정치적으로 바르게 보인다. 그러나 증거는 제한되어 있고 지지 세력은 약해 보이며 과거의 명성에 의존하는 듯싶다. 386 세대 출신의 정치인 같다.
다행이라면 신진 세력이 합류하고 있다는 점.
두 집단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믿음의 조상으로 찰스 다윈을 섬기고, 다들 천재성을 보이는 데다, 글도 잘 쓰고 시쳇말로 말발도 세다는 점이다.
진화를 부정하는 세력과 벌이는 싸움은 싱거워 보인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논쟁을 지켜보면 진화론을 손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더 치열한 것은 진화론 내부의 논쟁이다. 왜들 그러나 싶게 상대방에 대한 비판을 삼가지 않는다. 하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섬기는 그 많은 종교, 그러니까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사이의 배척 의식을 떠올리면 일견 이해가 간다.
그런데 교양 수준에서 보자면 다윈의 후예들이 벌이는 논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논의 수준이 높고 깊은 데다 쟁점과 토론 결과를 한데 모아 놓은 책이 없기 때문이다. 장대익의 <다윈의 식탁>(바다출판사 펴냄)이 차지하는 위상은 바로 이 지점이다. 진화론에 동의하지만, 진화학자 내부의 논쟁점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교양 과학 독자들이 느끼는 지적 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해 준다는 말이다.
<다윈의 식탁>은 구상부터가 신선하다. 2002년 5월, 세계적인 진화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명성에 걸맞게 유명한 진화학자들이 장례식에 모여든바, 킴 스티렐니와 엘리엇 소보가 진화를 둘러싼 그간의 논쟁을 톺아보는 끝판 토론회를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토론 방식은 리처드 도킨스팀과 스티븐 제이 굴드 팀으로 나누어 닷새 동안은 쟁점별로 토론하고 마지막 날에는 도킨스와 굴드의 공개 강연과 종합 토론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토론회가 매일 저녁 다섯 시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한 다음, 7시부터 두 시간 동안 토론을 하는 형식인지라, '다윈의 식탁'이라 장대익이 명명했다. 토론은 BBC와 <네이처>를 통해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눈치챘겠지만 다 가상으로 한 말이니, 지은이가 얼마나 너스레를 잘 떤 건지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첫날의 주제는 자연 선택의 힘이다. "자연 선택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적응인 것과 적응이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와 "인간의 마음과 행동도 자연 선택의 산물, 즉 '적응'이라고 볼 수 있는지"를 다룬다. 이 장은 강간이 과연 적응인가를 주제로 논의가 시작하는지라 초반부터 뜨겁게 진행된다.
지은이는 적응을 윤리적 잣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강간의 자연사>를 쓴 랜디 손힐과 그를 지지한 스티븐 핑커와 레다 코스미데스의 진영 논리를 비판한다. 굴드 쪽은 20년 전 사회생물학을 비판할 적의 논리를 반복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둘째 날의 주제는 "이타적인 행동은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가"인 바, 이 주제는 자연 선택이 유전자, 개체, 집단 가운데 어느 수준에서 작용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논쟁이다. 지은이는 다수준 선택론에 힘을 싣는다. 단세포끼리 협력하여 더 큰 다세포를 만드는 과정에서 배신의 문제를 해결했으리라 본다. 통시적 관점에 서면 다수준 선택론이 생명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셋째 날의 주제는 유전자의 정체다. 진화학자 사이의 난맥상을 보여주는데, "유전자를 발생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로 보는 관점과 오케스트라의 한 단원으로 보는 견해"가 충돌한다. 지은이는 이들의 레토릭(수사)을 변형해 요리법으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낸다. 요리사는 요리법에 맞춰 음식을 하지만 재료의 선택과 조합 방식에서 차이를 보여 서로 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선보이게 마련이다. "유전자가 기본적으로 발생 과정을 지시하기는 하지만 주변 환경과 어떻게 상호 작용했느냐에 따라 최종 산물이 결정된다"는 것.
넷째 날의 토론은 진화의 속도와 양상. 가만히 보면 진화학자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주제는 대체로 다윈이 곤혹스러워했던 주제다. 그 하나는 앞에서 살핀 이타성 문제이고, 두 번째는 진화의 속도였다. 기본적으로는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지만, 불연속적인 화석 기록 때문에 도약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이 지점을 잘 파고든 이가 굴드인데, 대니얼 데닛의 비유에 기대면 멀리뛰기에서 도움닫기 할 때의 보폭과 점프할 때의 보폭이 매우 다르듯, 진화가 도약하듯 이루어진다는 단속 평형론을 제기했다. 지은이는 이 주제와 관련해 '이보디보'의 출현으로 굴드의 관점이 좀 더 지지받고 있다는 점을 밝혀놓았다.
다섯째 날의 주제는 생명은 진보하는가이다. 생명의 역사를 두고 도킨스 쪽은 적응과 생성을 강조하고, 굴드 편은 우발성과 소멸을 돋음 새김 한다. 도킨스는 "최초의 복제자에서 염색체가 생기고, 이어서 원핵세포, 감수 분열과 성, 진핵 세포 그리고 다세포 등이 출현했던 생명의 거대 파노라마"를 떠올려 보라며 생명의 진보성을 주장한다.
이에 맞서 굴드는 "진화 역사의 몸통에 해당하는 박테리아를 간과한 채 꼬리 끝에 붙은 한 움큼의 털에 불과한 인간만 보고, 복잡성 증가를 진화의 추세로 삼는 것은 꼬리로 몸통을 흔들려는 잘못된 시도"라고 주장한다. 주목할 부분은 이 논쟁에서 도킨스의 과학주의(과학의 신빙성에 대한 강한 신뢰)적 면모와 굴드의 사회 구성주의(과학이 사회적 이념에 오염될 가능성을 인정)적 풍모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마지막 날은 진화와 종교를 다루었다. 잘 알려져 있듯 도킨스는 종교가 '기생 밈'이라 주장한다. 굴드는 과학은 암석의 연대를 알아내고 종교는 만세 반석을 찾는다며 "과학과 종교가 '중첩되지 않은 앎의 권역들'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제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면 지은이가 공저자로 참여한 <종교 전쟁>(사이언스북스 펴냄)을 읽어보길!)
<다윈의 식탁>은 가상 대담 형식으로 구성한지라 잘 읽히는 데다 각 패널의 발언은 그들의 주저를 바탕으로 지은이가 잘 풀어 놓아 정보량도 많다. 기실 수십 권의 책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진화를 둘러싸 일대 논쟁을 요령껏 이해할 수 있는 미덕이 있다.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글을 써냈던지 연재할 적에 실제 있었던 일인 줄 알고 보낸 메일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다.
그러니 지은이 말대로 진화한 진화론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과학 정신의 한 면을 잘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아무리 다윈의 영향 아래 있더라도 그 이론의 빈틈을 드러내 다른 사유의 지평을 열어가려는 치열한 비판 정신, 그리고 도킨스와 굴드로 상징되는 두 진영이 토론과 논쟁을 치열하게 벌이며 새로운 진화론을 세워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압도적 진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신봉하는 것은 과학 정신이 아니다. 끊임없이 합리적 비판 정신으로 앞선 세대의 지적 결과물을 전복해 인식의 새 지평을 여는 것이 과학 정신이다. 진화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며 진보는 어디서 비롯하는지 알게 되는 기쁨도 누렸다는 말이다.
김현태 kimht100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