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의 길 ‘끝나지 않은 28년투쟁’
동아투위와 민주언론투쟁
감시, 구금, 투옥에 생활고겹쳐 혹독한 시련
해직자 출판, 학문, 재야운동으로 각개약진
80년 해직기자와 민언협 구성 민주화 운동
2003년 3월17일 저녁,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동아투위 결성 28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동아투위는 "동아일보는 동아투위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동아투위의 명예회복에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지난 28년간 한번도 우리의 투쟁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 없지만 우리의 희생과 노력의 결실인 언론자유가 지켜지길 바란다"는 내용의 기념사를 발표했다. 이날 기념식에 모인 인사들의 면면은 김언호(한길사 대표), 성유보(방송위원), 이부영(무소속 의원), 임채정(민주당 의원), 정연주(KBS 사장) 등 정말 `화려'했다. 그러나 한 회원은 "동아투위 회원들이 다 잘 나가는 줄 아는 데 화병(火病)으로 여럿이 죽었고 아직도 고생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말했다.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 실천선언으로 피어오르던 자유언론운동은 채 반년이 못되어 정권에 굴복한 동아일보 회사측의 무더기 해임 조치로 좌절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동아방송 포함)에서 무려 134명의 젊은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 포함)들이 해직되어 조선일보 30여명과 함께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해직 기자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젊은 기자들은 강제 해산 다음날인 3월18일 신문회관에 모여 곧바로 동아투위를 결성했다. 동아투위는 당시 권영자 문화부 차장을 투위 위원장으로 뽑았다. 이들은 3월19일 회사측의 왜곡 선전에 대하여 반론문 `위장 자유언론에 통탄하며'라는 성명서를 내고 다음과 같이 결의를 다졌다. "비겁한 자 물러나도 용감한 자는 굳셉니다. 우리는 언론자유 투쟁에 순사(殉死)하렵니다.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 위해서…. 우리의 싸움 앞엔 승리만이 있을 것입니다".
동아투위가 결성되자 회사측은 주필 이동욱을 내세워 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작금 사태의 명분은 언론자유라고 하지만 쟁점은 절대로 언론자유가 아니라 사내의 위계질서이다.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해임이란 방법밖에 없었다"고 대응했다. 회사측은 또 자진 사표를 제출한 편집국장 송건호의 사표를 수리하고 투위에 가입한 기자들을 해임하거나 무기정직시켰다. 무기정직 처분은 6개월 내에 회사측이 복직처분을 하지 않으면 자동 해임되는 것으로 해임처분과 다름없었다.
투위를 결성한 해직 기자들은 75년 9월17일까지 만 6개월 동안 거의 매일 아침 출근시간에 회사 정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이면서 출근하는 사원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해임무효 확인 청구소송을 법원에 제출하여 법정투쟁을 도왔고 미국의 월간지 AD는 동아투위에 자유언론상을 수여했다.
동아투위는 동아일보 인근 종로구 청진동에 사무실을 마련하여 흩어진 기자들을 모으는 연락창구 역할을 했다. 동아투위 회원 조양진은 "당시에는 전 국민과 전 세계의 성원이 있어 외롭진 않았다"면서도 "처음에 경비가 없어서 여관 방을 얻어 투쟁하다가 나중에 사무실을 열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피력했다.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험난했다. 해직 기자들은 우선 권력으로부터 각종 탄압을 받았다. 해직 기자 개개인에 대한 감시와 연행, 구금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김병익, 박종만, 김종철, 이부영, 김두식, 성유보 등이 이러 저러한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이중 몇 명은 구속되어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생활고는 더욱 깊어갔다. 기자들의 해고에 반대하여 사퇴했던 송건호는 생전에 그때의 고통을 이렇게 회고하곤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생활에 대한 불안이 끊임없이 엄습해 오고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워지곤 했다. 이럴 때면 나는 미친 듯이 서오릉 방면으로 뛰어갔다. 숨이 차 헉헉하면서도 두려움은 떠나지 않았다".
또 이명순(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은 "나도 힘들었지만 더욱 힘든 것은 집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사자보다 가족들이 더 고통을 받았던 것 같다. 앞장서서 일한 것은 동아투위였지만 동아투위를 가능하게 한 것은 가족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동아투위 회원들은 해마다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했던 10월24일이 오면 재야 각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자유언론과 민주사회를 열망하는 의지를 다졌다.
77년 12월30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만기 출소한 이부영, 성유보의 출감 환영회에서 동아투위는 `민주민족 언론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언론자유 차원을 넘어 언론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직을 박탈당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 민중에게 자유를, 민족에게 통일을. 이것은 시대의 요청이며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방향이다. … 참된 정치, 참된 경제, 참된 민족의 비전을 위해 `사이비 언론'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기약할 수 없는 험로를 걷던 동아투위 회원들에게 슬픔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78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되었다가 79년 10.26 이후 석방되었던 당시 동아투위 위원장 안종필이 이듬해인 80년 2월29일 간암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신문사에서 쫓겨난 후 이미 조민기,이의직 등 두 기자를 잃었지만 안종필의 죽음은 옥고에 뒤이은 것이어서 동아투위 회원들에게는 더욱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김태진(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초대 이사장)의 회고. "안종필 위원장은 옥고를 치르면서 병이 악화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봄이 찾아오는 듯할 때 우리가 맞이한 그의 죽음은 모두에게 너무나 큰 회한이었다. 우리들은 한에 맺힌 슬픔을 참지 못해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한편 이미 해직 기자 일부는 `복직에 연연하지 않을 정도의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해직 기자 가운데 일부는 출판계로, 일부는 학문의 길로 나아갔지만 이부영,김종철,성유보,임채정 등 또다른 일부는 독재권력에 대항하여 투쟁 경력을 쌓아가면서 80년대 재야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또한 김언호 등은 출판활동을 통하여 수많은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을 발간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저변을 넓히는 데 공헌했다. 성유보의 말을 빌리면, "자의도 있었지만 타의로도 재야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취업해 있으면 권력의 감시로 곧 쫓겨나곤 했기 때문이다".
10.26 이후 한때 세상이 변하는 듯했다. 해직 교수들이 복직되고 제명된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왔다. 유신의 수난자와 피해자들이 대체로 원상회복되어 사회는 정상을 되찾는 듯싶었다. 그러나 해직 기자들에게 복직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80년 `서울의 봄'과는 상관없이 이들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5.17사태를 맞이하여 또다시 이들에겐 기약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다.
80년 민주화의 봄이 좌절되면서 신군부에 의해 1,000여명의 기자들이 추가로 해직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10.26 사건 이후 `서울의 봄' 때 언론자유나 편집권 독립을 주장한 언론사의 기자들은 거의 다 해고된 것이다. 동아투위는 이들 80년 해직 기자들과 조선투위, 진보적 출판인들과 함께 84년 12월19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의 전신)를 결성하고 전면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또 이부영, 임채정, 김종철 등은 민통련이라는 재야운동의 통일조직체 결성을 주도하여 그 후 87년 6월민주항쟁을 성공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동아투위는 한국 자유언론운동사뿐 아니라 민주화운동사에서도 중요한 궤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이 외쳐온 자유언론과 민주민족 언론은 고난의 길이었다. 그들을 지켜준 것은 오로지 `열화와 같았던 국민들의 격려'였다.
75년 당시 동아투위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취재,송고하여 세계 주요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한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이었던 홍건표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분들의 궐기가 없었다면 아마도 유신독재의 존속은 훨씬 더 장기화되었을 것이다. … 그러하거늘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도록 그들과 그 가족들이 계속 고난을 겪고 있는 사태를 방치해온 우리 사회는 너나 없이 옷깃을 여미고 반성해야 하리라 본다".
조선투위는...75년 해직32명 결성 95년 고령화로 해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밤새 매를 맞고 나오면 기자들끼리 "남산 가서 라면 먹고 왔다"는 은어로 표현할 정도로 군사정권의 언론 탄압이 일상화돼 있던 1970년대. 독재정권에 굴복해 독립성을 상실한 언론사는 자유언론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적이었다.
동아투위가 출범한 75년에 또다른 투위가 생겨났다. 조선일보에서 쫓겨난 32명의 기자들로 이뤄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그것이다. 젊음을 바쳤던 신문사에서 버림받고 거리를 전전해야 했던 그들의 운명은 동아투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74년 12월18일 조선일보는 신홍범,백기범 등 두 기자를 해임했다. 편집권에 도전했다는 이유였다. 두 사람은 전날 조선일보 가판에 실린 `허점을 보이지 말자'라는 유정회 국회의원의 글을 보고 편집국장에게 항의했다. 당시 유신체제가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상황에서 이 글은 유신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내용이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적어도 형식상의 균형이라도 맞춰달라는 이들의 호소에 조선일보측은 해임으로 대답했다.
이에 분노한 기자들이 제작 거부 움직임을 보이자 회사측은 창간기념일인 다음해 3월5일까지 이들을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복직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기자들은 75년 3월6일부터 농성에 들어갔다. 6일간의 제작 거부 기간 동안 회사측은 간부들을 시켜 통신을 베껴 신문을 냈고 기자들을 차례로 해임 또는 정직조치했다.
조선투위는 20주년을 맞는 95년 위원들의 고령화 등으로 인해 투쟁위원회로서 소임을 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깃발을 내렸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정론지로 복귀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요구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