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결정이 전국을 강타(强打)하고 있다. 나라는 이미 벌집을 쑤셔 놓은 꼴이 돼 버렸다. 그런데도 국민은 알 필요도 없고, 옳고 그름을 따져서는 안 되며, 불필요한 논쟁도 하지 말란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다.
군사 전문가들의 견해와 국방부 장관의 발언을 들어봐도 사드가 한국에 꼭 배치돼야 할 이유는 알 수 없다. 수도권에는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국내총생산(GDP)의 60%, 자본의 70% 가까이가 몰려 있다.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이 불과 수분 만에 도달한다. 그런데 성주 배치로 수도권은 사드의 요격거리 밖이므로 수도권 방어를 위해 별도로 패트리엇 미사일을 배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주에도 중국과 러시아가 알레르기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드 대신 패트리엇을 배치하면 될 것 아닌가. 왜 박근혜 정부는 허겁지겁 사드 배치를 결정했는가. 국방부는 북한이 수도권을 사거리가 짧은 스커드 미사일로 공격할 가능성이 커 사드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북한이 노동 미사일의 사거리를 줄여 수도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누구를 보호하고 무엇을 방어하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박근혜 정부는 이번 결정으로 나라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박근혜 정부에서는 한국의 미래에 대한 전략적 사고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 한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처럼 당장 위급한 상황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양극화로 인한 사회의 이중화, 고령사회 진입에 따른 생산력 감소와 사회 활력 상실, 성장동력 부족, 민주주의 및 공공적 가치의 후퇴 등 우리 사회가 뒷걸음치는 현상이 수두룩하다.
따라서 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경제 협력의 틀 안에서 남한이 가진 유.무형의 자본과 북한이 가진 인적.물적 자원을 생산적으로 결합한다면 남북이 동반성장(同伴成長)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생산성 및 경쟁력 향상, 시장 확대, 분단비용 감소, 상호 이질감 해소로 경제의 선순환(善循環)이 이뤄질 수 있다. 남북 평화 공존과 이를 위한 동북아시아 협력관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사드 배치는 평화 공존의 길을 막아 버릴 것이다. 중국이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제재를 가해 오면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맞닥뜨릴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립하는 동북아시아 신냉전이 우리 경제의 앞길을 원천 봉쇄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북방의 문을 걸어 잠그면 제2의 경제 도약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략적 사고의 부재(不在)를 지적하는 것이다.박근혜 정부에 과연 현명한 균형감각과 자주성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사드 배치 결정으로 대한민국 대외정책의 전략적 균형추는 더욱 미국 일방으로 기울어졌다. 우리는 사드로 무엇을 얻을 것인지도 잘 모른 채 잃어버릴 것에 전전긍긍하는 상황이다.
국제 정치의 냉혹함은 종종 실력 없이 ‘자고자대(自高自大)’하던 국가를 존망의 기로로 몰아넣었다. 반면 현명한 약소국들은 강대국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통해 실리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그들은 특정 일방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며 다른 일방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다중(多重)벡터론(multivectorism), 즉 다원주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다.작금의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휘둘리다 결국 조선 땅에 청일전쟁이라는 싸움판을 제공했던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연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하는 민족이 짊어져야 했던 비참한 역사가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민주적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절차의 문제는 민주주의 본질과 직결된다. 그런데 사드 배치에 관한 최소한의 정보 공개나 공론화 과정도 없었다. 반대 의견은 국론 분열이라 매도하고, 배치 후보지를 거짓으로 언론에 흘리며 국민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 어디에도 국민은 안중에 없어 보인다. 사드가 단순한 무기체계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평화적 통일, 국민의 안위와 우리 경제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면 그 선택권은 주권자인 국민의 것이지 한·미 동맹 당국자들만의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은 꿈과 희망, 믿음을 상실한 상태를 ‘난세’라고 했다. 난세에는 국가가 국민을 적으로 대하고 국민은 국가에 대한 믿음을 거둔다. 박근혜 정부 들어 국가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국민과의 충돌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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