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9사단 병력으로 구성된 1개 대대 규모의 추격대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을 공격했다. 만주 일대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에 시달리던 일본군이 독립군 근거지를 직접 공략한 것이다.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 산지에 매복했다가 일본군 추격대를 포위 공격해 대승했다. 일본군 157명이 사살되고 300여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 독립군은 4명만 전사했다. 만주지역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던 봉오동 전투다. 무장독립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히는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는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했다가 또다시 대패한 사건이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대한 역사 서술에서 ‘최운산’(1885~1945)이라는 이름을 찾기는 쉽지 않다. 최운산은 봉오동 전투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던 최진동(1883~1941)의 동생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관련해서 주로 거론되는 이름은 홍범도(1868~1962), 안무(1883~1924), 김좌진(1889~1962), 이범석(1900~1972), 최진동 정도다. 최근 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두 전투의 숨은 주역이었던 최운산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는 지난달 4일 서울 종로구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회관에서 창립식을 열고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이끈 군무도독부와 북로독군부, 북로군정서 등 세 무장부대를 창설한 실제 주역임에도 행적과 활동상은 극히 일부만 알려져 있다”며 기념사업회 창설 취지를 밝혔다.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이사장을 맡았고, 이장희 전 한국외국어대 부총장 등 56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반적으로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북로독군부가 주도했고, 대한북로독군부를 이끈 것은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라고 알려져 있다. 청산리 전투와 관련해서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주축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창립식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홍범도, 김좌진 장군을 언급해왔지만, 이 지역(만주)에서 오랫동안 독립전쟁을 위한 인적 물적 기반을 구축해온 주역들은 외면해왔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를 쌓고 만주지역 독립군에 무기와 군자금을 제공해 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삼형제이고, 그중에도 최운산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본다.
최운산은 1885년 지린성 연길현 국자가(지금의 연길)에서 태어났다. 삼형제의 둘째인 그는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강력한 무력투쟁만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 믿고 1908년 청의 군대에 들어갔다. 최진동은 청나라 지방 군대의 고급간부가 됐고 최운산은 지방 군대의 보위단 간부를 지냈다. 동생도 보위단 간부로 근무했다. 최운산은 상당한 사업 수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봉오동, 도문, 석현, 서대파, 양수천자 일대 토지를 거의 소유했고, 이 외에 제면공장, 제유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 여러 공장을 운영하고 축산 및 곡물무역으로 거액의 재산을 모았다. 그는 이 돈으로 당시 황무지였던 봉오동을 매입해 개간하고 마을을 만들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부모와 형제를 포함해 최씨 일가가 모두 봉오동으로 이주해 신한촌(新韓村)이라는 마을을 건설했다.
최운산은 1912년 보위단 간부직을 사퇴한다. 이때 중국 동삼성 정부의 배려로 다수 조선인과 소수 중국인으로 구성된 1개 중대 병력이 최운산을 따라나와 그의 사병이 됐다. 이후 조선에 망명해온 청년들이 결합하면서 사병 규모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최운산은 1915년 봉오동 뒷산을 개간해 연병장을 짓고 대규모 막사 3개동을 지어 병력을 양성했다. 본부가 있는 저택 둘레에는 3000여평 규모의 토성을 쌓고 대포를 배치했다.
최운산은 사병집단 도독부를 모체로 해 1919년 소련에서 구입해온 신식무기로 무장한 670여명 규모의 정식 독립군부대 군무도독부를 창설하고 친형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최운산 자신은 참모장을 맡아 재정과 행정을 책임졌을 뿐 아니라 군사정보 수집 및 전투에도 참여했다. 최운산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운산 이외에 명길, 문무, 만익, 풍, 빈, 고려 등 모두 7개의 이름을 사용해 가며 무기구입과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 봉오동 전투 시 일본군의 토벌계획을 사전에 입수해 매복 작전을 짠 것도 최운산의 첩보에 근거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독립사(1965)에 따르면 군무도독부는 670여명 규모에 수백정의 장총을 보유했으며 군복의 색깔이 중국군인들의 복색과 같아 중국군과 구별하기 곤란했다고 한다. 이 군무도독부가 바로 1920년 봉오동 전투의 주축 중 하나였던 부대다. 군무도독부는 두만강을 건너 일본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자주 펼쳤다.
봉오동 전투에 앞서 만주 일대에 흩어져 투쟁하던 독립군들은 1920년 북로독군부라는 이름의 독립군 사령부로 통합된다.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씨(1975년 사망)는 1969년 남편에 대한 서훈을 요청하는 진정서에서 독립군들이 통합한 원인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독립군의 모든 장비, 피복, 식량, 무기 등을 최운산이 책임지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북로독군부의 편성과 관련해 일반적으로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 연대장 홍범도, 제1중대장 이천오, 제2중대장 강상모, 제3중대장 강시범, 제4중대장 조권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견해도 있다.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씨에 따르면, 당시 편성은 ‘총재 겸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 참모장 최운산, 참모 최치흥, 참모 이태범, 의무원장 박영’ 등이었고 김좌진, 홍범도, 오하묵이 각기 제1, 제2, 제3연대장을 맡았다.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이끌어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최운산 형제들의 공로와 관련해 독립운동가 이강훈(1903~2003)은 “일찍이 정착해 생활기반을 굳혀 놓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 전쟁의 장비며 군량 등을 보급하여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한 최진동, 최운산과 최치흥 등 3형제의 업적은 봉오동 전투 등을 비롯해 당시(경신년) 대일 항전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1987)는 “통합된 후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간도국민회군은 최진동 장군의 사재에 많은 힘을 입었다”며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고 안무의 국민회군이 정비된 독립군이었지만 정규군인 일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670여명의 강력하고 완전무장한 최진동 장군의 군무도독부와의 통합은 1200여명에 이르는 단합된 무장력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립군이 결성됨으로 하여 봉오동 전투의 승리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최운산은 무장독립전쟁을 하려면 독립군의 규모가 더 커져야 한다는 판단 아래 대종교 지도자 서일 총재와 함께 뒷날 청산리 전투의 주축이었던 북로군정서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자신의 소유지인 왕청현 서대파를 북로군정서 주둔지로 내주고 6개월 단기군사학교 군사연성소를 설립, 운영을 지원했다.
최운산은 1923~1926년 사이 여섯 차례 투옥과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날짜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1937년에는 보천보 전투 배후로 지목돼 투옥됐고 1939년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군자금을 모금했다는 이유로 10개월간 감옥에 갇혔다. 최운산은 재산의 대부분을 군자금으로 소진해 해방 당시에는 재산이 거의 남지 않았다. 최운산은 광복을 한 달여 앞둔 1945년 7월5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다 평양으로 피신한 큰아들 봉우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고문후유증이 재발해 사망한 것이다. 후손들에 따르면 그는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일생 동안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고 의롭게 살고자 했으니 부끄러움이 없다. 시대가 격변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 형제들이 지금은 모두 고초를 겪고 있지만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말라”고 유언했다.
최운산은 1977년 대통령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서훈 과정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손녀 최성주씨(59)에 따르면 애초 독립유공자 서훈이 결정된 것은 1961년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훈 업무를 맡았던 총무처 직원이 최운산의 장남 봉우씨에게 뒷돈을 요구했고, 이에 격분한 봉우씨가 주먹을 날려 서훈이 취소됐다. 서훈이 미뤄지자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씨는 1969년 진정서를 보내 서훈을 요청했다.
최운산의 손녀 최성주씨(59)는 지난해 9월과 올해 4월, 6월에 봉오동을 다녀왔다. 봉오동에는 최진동 장군의 외손자인 고종 6촌 오빠가 살고 있다. 봉오동 입구에는 집터가, 그 일대에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씨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최운산)를 평양 비행장 근처 야산에 모시고 나중에 묘소를 봉오동으로 옮기려 했으나 전쟁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10월에 봉오동을 찾아 그곳의 증조부 묘 아래에 할아버지의 비석을 세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은 창립식에서 “향후 봉오동, 청산리전투에 관한 좀 더 깊고 넓은 연구와 이 전투의 의의를 보다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최운산 장군과 같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한 연구 지형을 더 넓혀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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