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문인은 총 52명이다. 대부분 일본이 우리 문인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조선문인협회'나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며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이용해 친일 활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저의 마지막 ‘친일파’ 책입니다”
광복절에 맞춰 출간한 ‘친일파의 한국현대사’(부제 :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던 악질 매국노 44인 이야기)는 30여년간 스무권이 넘는 친일역사 관련 서적을 펴낸 언론인 정운현의 마지막 친일파 책이다. 그는 “이제 제가 단행본으로 펴낼만한 내용은 없어요”라며 “다음 세대가 이를 바탕으로 계속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새로운 문건, 이를테면 중국 당안관(국가기록보존소) 문서가 공개돼 만주지역 친일파들의 행적이 새로 나오지 않는 한 친일파 개인에 대한 인물탐구가 친일파 연구에 주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해방 71년이 지나면서 친일파도 잊히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발품 팔아 한 장 한 장 어렵게 구한 친일파들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고종 협박하고 훈장받은 송병준
송병준(1858~1924)은 어떤 계기로 친일파가 됐을까? 송병준은 1871년 무과에 급제해 벼슬에 올랐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의 민씨정권은 청나라와 가까웠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옥균 등 개화파는 일본을 등에 업고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피신했다.
같은해 송병준은 조선정부로부터 밀명을 받고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 암살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송병준은 김옥균을 살해하지 않고 오히려 김옥균에 설득당했고, 자신이 암살하러 온 사실까지 털어놨다. 김옥균과 동지가 됐다. 하지만 김옥균이 암살당하자 조선에 반감을 품고 노다 헤이치로(野田平治郞)로 창씨개명하고 조선인임을 포기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그는 일본군 병참감 오타니 기쿠조 육군소장의 군사통역을 맡으며 친일파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과 같은해 8월18일 유신회를 조직하고 이틀 뒤 일진회로 이름을 바꿨다. 일진회는 이용구의 진보회와 통합하고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제병합당할 때까지 일제를 돕는데 헌신했다.
1904년 12월 송병준은 일본군 마쓰이시 대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을사늑약을 모의했다. 한국인이 나서 나라를 빼앗아 달라고 애걸한 것이다. 1907년 친일신문 ‘국민신보’의 2대 사장을 맡았고, 이완용 내각에서 농공상부대신을 역임했다. 일제가 고종을 물러나라고 하자 송병준·이완용 등은 이에 앞장섰다.
정교 ‘대한계년사’의 한 대목이다. “고종이 물러나지 않자 이완용, 이병무, 송병준은 모두 다그치며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1907년) 7월21일 이완용과 송병준은 공손하지 않은 말씨로 수없이 황제의 낯빛을 어둡게 했고, 이병무는 칼을 빼들고 황제를 위협했다. 황제는 마지못해 할 수 없이 그 일을(양위) 허락했다.”
송병준은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앞장선 공로로 같은해 10월 일본 정부에 훈1등 욱일장을 받았다. 1911년 자작 작위, 1920년 한 등급 위인 백작으로 승작됐다. 백작 작위는 장남 송종헌이 물려받았고, 송종헌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송종헌의 아들 송재구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나온 뒤 홋카이도 땅을 불하받았다.
송재구의 아들(송병준의 증손) 송돈호는 ‘송병준 땅 찾기’에 나섰던 인물이다. 송돈호는 2005년 12월 여야가 합의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조상 땅 찾기 소송 중이던 2007년 국유지인 부평 주한미군 기지 13만평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다 구속됐다.
토사구팽 당한 이용구
송병준과 함께 일진회에서 활동한 이용구(1868~1912)는 원래 일본에 대항하던 동학군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으로 동북아 정세가 변할 것 같자 동학 3대교주 손병희와 이용구는 각각 러시아와 일본을 각각 지지했고, 이기는 쪽에 줄을 서기로 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조선 내 조야에서는 이런 기회주의 풍조가 만연했는데 이는 약소국의 비운인지도 모른다”고 표현했다.
이용구는 일진회 회장까지 맡으며 한일합방 청원운동을 펼쳤다. 이용구의 바람은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진 뒤 25만 일진회원을 이끌고 간도로 가 떵떵거리며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300만 엔이 필요했는데 이에 대해 가쓰라 다로 일본 수상을 만나 “300만 엔이 아니라 3000만 엔이라도 책임지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하지만 주권을 뺏자 일본의 태도는 변했다. 일제는 일진회에 대해 강제해산명령을 내렸다. 일진회원들의 불만이 터지자 이용구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일본 스마에 머물던 이용구는 결국 울화병에 걸렸고, 죽기 3달 전 친구인 다케다 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속내를 드러냈다.
“어릴 때부터 평생 제가 추구한 것은 일신상의 사리가 아니라 국가의 대리와 인민 구제의 소망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잘도 속임을 당하고 잘도 농락됐음을 깨닫게 됩니다. 2000만 인민을 일본의 최하등민으로 빠뜨린 죄도 소생에게 있습니다. 소생을 보고 매국노라 부르는 사람이 있어도, 어찌 입이 있어 변명을 하겠습니까.” 쓸쓸한 최후였다.
군부독재와도 함께한 모윤숙
친일은 군부독재와 이어진다. 상징적인 인물이 모윤숙(1909~1990)이다. 그는 인민을 학대하는데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사용했다. “가난헌 이 몸이 무엇을 바치리까? 오로지 끓는 피 한 목음을 축여보태옵니다”(삼천리 1941년 1월1일자) 그는 강제동원에 끌려가는 조선 청년들을 ‘정의의 용사’로 추켜세웠다.
지원병제가 확대되자 그의 재능(?)도 폭발했다. “사실 나는 육군 지원제가 공포될 때보다 이번 해군 특별 지원병이 공포될 때 더 감격이 됐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바다를 무척 좋아하는 데서 나온 감격일 것입니다.”(춘추 1943년 6월호)
해방 후에도 모윤숙은 기득권을 놓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시를 발표했고, 반공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모교인 이화여대에 출강해 국문학을 강의했고, 1960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공화당 전국구의원, 전두환 정권에서는 문학진흥재단 이사장과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민주화 이후 1990년 무탈했던 80 인생이 저물었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사다.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듯, 무덤 속의 시체가 관 뚜껑을 열고 무덤에서 걸어 나온 듯,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져 세상을 뒤흔들어놓는다. 친일 문제는 여전히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물이요, 살아서 파닥거리는 갓 잡아 올린 생선이다.”(책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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