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안데레사기자]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뉴스프리존기자는 서대문을 방문하게 되었다. 앞서, 71주년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15일 안중근 의사 순국지를 잘못 언급하는 '실수'를 범했다. 또 지난해에 이어 광복절을 '건국의 날'로 규정하고, 대일 과거사 언급을 배제하는 등 이번 경축사에서 역사관 논란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박대통령은 "대한민국이 광복의 역사를 만들고, 오늘날의 번영을 이룬 것은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니었다"며 "안중근 의사께서는 차디찬 하얼빈의 감옥에서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경축식장을 메운 수백명 청중 앞에서 연설했다.
하지만 안 의사 순국지는 하얼빈이 아니라 뤼순에 있는 감옥이었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오전 하얼빈 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뒤 일제에 신병이 인도되면서 곧바로 일제가 관할하던 뤼순으로 압송당했다. 일제는 이듬해 3월26일 사형을 집행하고 안 의사를 뤼순 감옥 인근에 매장했다.
이런 가운데 예년과 달리 올해 경축사에서는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과거사 관련 언급이 배제됐다. "한·일 관계도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라는 원론적 한마디에 그쳤다.
지난해 말 양국 위안부 합의를 감안한 행보로 보이지만, 일본이 위안부 지원재단 출연금 문제나 대사관 소녀상 이전 문제 등에서 자국 입장을 고집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은 간과됐다. 동북아 안보를 위협하는 일본의 우경화나 군국주의 회귀 시도에 대한 경고 없이, 북핵과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만 강조됐다.
박 대통령은 또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언급했다. 지난해 경축사 때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라던 언급에 이어 2년째 '건국 기념일'을 고집했다.
이는 뉴라이트 성향의 우익인사들이 주창하고 있는 '건국절'(1948년 8월15일) 주장에 힘을 싣는 셈이어서 학술적·정치적 논란이 불가피하다. 3일전 청와대 오찬에서 "건국절 주장은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된다. 대한민국은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탄생했다"던 92세 광복군 노병의 건의는 묵살됐다.
앞서 박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13년 광복절 경축사 때도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박 대통령은 당시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면서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암은 대학자가 아니라, '위서'(僞書) 논란이 불거진 사서 '환단고기'에 인용됐을 뿐이라는 학계 비판이 있었다.
'역사는 혼'이라는 취지의 언급은 박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때 재차 활용됐다. 지난해 11월10일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발언했다. (71주 박근혜대통령의 축사내용중 일부)
그렇다면, 우리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막연히 그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는 것과 왼손 약지 끝을 잘라 태극기에 혈서를 써 단지동맹을 결성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지는 않은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상과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했다. 회담의 표면적인 목적은 철도 및 경제 현안 논의였으나, 실제로 그가 노린 것은 한일합방 시 영해 분할과 이권에 대해 러시아와 의견을 나누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야심을 눈치챈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중간에 정차하는 차이차거우역은 두 명의 동지들에게 맡기고, 홀로 최종 목적지인 하얼빈 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러시아 철도국은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를 중간에 정차시키지 않고 하얼빈역으로 곧장 보낸 것이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우리가 알고 있는 하얼빈 의거가 일어났다. 안중근은 삼엄한 경비 속에서 열차를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미리 준비해둔 6연발 권총으로 그를 저격했다. 거사를 마친 안중근은 도망가려는 기색도, 주눅이 든 기색도 없었다. 그는 호위병들에게 체포되면서도 러시아어로 대한 독립만세(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를 외쳤다.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연행된 안중근은 심문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를 막힘없이 당당하게 설명했다. 그 이유는 15가지에 달했으며, 끝으로 심문관에게 “이런 내 생각을 일왕에게 전하라. 동양을 위기에서 구해주길 갈망한다.” 고 요구했다.
안중근 의사가 밝힌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유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셋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넷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번째,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위 부분은 형무소에서 미리 이벤트에 참석한 사람들에 한 하여 외치게 하여 객석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기) 하였다.
하얼빈에 구류되어있던 안중근은 11월 4일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도 안중근은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그가 입에 담는 말은 복수나 처단이 아닌 ‘동양의 평화’였다.
- 당신은 동양평화라고 하는데 동양이란 어디를 말하는가? = 아시아주를 말합니다. - 아시아주에는 몇 개의 국가가 있는가? = 그것은 중국, 일본, 한국, 태국, 미얀마입니다. - 당신이 말하는 동양평화란 무슨 의미인가? = 모두 자주독립 할 수 있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렇다면 그중 1개국이라도 자주독립 할 수 없다면 동양평화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 그러합니다.
안중근의 의연한 모습에 심문을 담당한 미조구치 검찰관과 감시를 맡은 헌병 치바 토시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안중근은 그들이 생각하던 ‘테러리스트’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치바는 옥중에서 늘 조용히 십자가에 기도를 올리는 안중근을 보고 “과연 어느 쪽이 옳은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안중근의 재판은 뤼순의 고등법원에서 진행되었다. 그에게 있어 이 법정이야말로 조국의 위기를 전 세계에 호소할 수 있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무참히 깨졌다. 안중근은 본래 정치범으로 다뤄져야 했으나, 세계의 이목이 안중근에게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안중근의 항거를 ‘지식 결핍과 오해에 인한 개인적 복수극’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그동안 묵묵히 있던 안중근은 최후 진술에서 피를 토하는 기세로 외쳤다.
나는 검찰관이나 변호인이 말한 것처럼 이토의 정책을 오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한국의 독립을 저해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 안중근의 최후변론
안중근이 이토록 주장하는 동양의 평화란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안중근의 삶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안중근은 1879년 7월 16일 평양 남부에 위치한 황해도 해주에서 부유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6살 되던 1894년, 동양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다.
동학농민운동은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발생했다. 농민들의 봉기에 당황한 조정은 이들을 군대로 진압하려다 실패, 청나라에게 동학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문제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평소 조선에 군침을 흘리던 일본까지 진압을 핑계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청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안중근은 가족들과 함께 전쟁을 피해 가톨릭 교회로 몸을 숨겼고, 이때 만난 빌헬름(홍석구)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은 또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빌헬름 신부는 “러시아가 이기면 한국의 주인은 러시아가 될 것이고, 일본이 승리하면 한국은 일본의 속국이 될 것이다.”라며 우려했지만, 안중근은 같은 동양국가인 일본을 믿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일본이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을 밀어붙였다. 조약의 내용은 군대 해산과 외교권 박탈 등 사실상 식민지 지배를 의미했다. 일본은 한국의 모든 행정을 감독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세웠고, 이때 초대통감으로 취임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일본의 야심을 깨달은 안중근은 항일운동에 투신, 동지들과 함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가 결성한 대한의군은 수적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대로라면 지도상에서 영원히 한국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한 안중근은 이 위기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거사를 결심했다. 하얼빈 의거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그런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은 단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서서히 세력을 뻗쳐오는 서구열강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이 평화적으로 화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세계는 동서로 나누어져 있고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시대이다. 러일전쟁은 서양의 동양에 대한 침략에서 말미암은 전쟁이다.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과 청나라가 일본의 항전 명분을 믿고 일본군을 지원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일본는 이 소명을 저버렸으며 조선의 독립은커녕 국권을 빼앗아 버렸다. 일본이 정책을 고치지 않고 이웃 나라에 대한 핍박을 계속한다면, 서양과 결탁해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한 것도 그가 약속을 배반하고 조선의 국권을 빼앗았으며,만주를 침략하고자 함으로써 동양평화를 영구히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 하는 길은 우선 조선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버리는 것이다.그러한 후에 서로 독립한 청·조선·일본 3국이 서로 화합하여 개화의 영역으로 진보하고,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다.이렇게 하면 동양평화는 실현되고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 동양평화론, 안중근
이런 이유로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거듭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판결을 받은 안중근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사형 이상의 형은 없습니까?”
안중근은 사형날짜를 기다리며 그의 생각을 정리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결연한 모습의 안중근과는 달리, 그동안 안중근을 지켜보며 그에게 경외심을 갖게 된 헌병 치바는 자신의 무력함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다.
-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하고 싶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서로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마지막까지 자기 임무에 충성을 다합시다.
안중근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는 치바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던 뤼순 감옥 형무소장 쿠리하다는 처형일을 15일간 연기해달라는 탄원서를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쿠리하다는 미안한 마음에 안중근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해달라.”고 했고, 이에 안중근은 “그럼 하얀 한복을 준비해 달라. 그것을 수의로 하고 싶다.”고 답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쿠리하다의 부인이 직접 만든 한복을 입고 처형장으로 향하기 전, 옥방에 유묵을 하나 남겨두었다. 그 유묵은 그동안 우정을 나누었던 헌병 치바를 위한 것으로 ‘군인은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본분이다.’ 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안중근은 치바가 느낄 죄책감을 덜어준 것이다. (치바는 안중근 처형 후 고향으로 내려가 부인과 함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안중근의 사형집행은 오전 10시 14분에 집행되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리고 6개월 후 한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한일합방(경술국치)가 일어났다. 이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3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거리에 나와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의 모습.
안중근은 당시 동아시아 정치 균형의 중요성을 인지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의 통찰은 – 비록 미완이긴 하나 – 동양평화론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천혜의 항구지역인 뤼순을 영구 중립지대로 하고 한·중·일 삼국이 통화를 통일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으로 운명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동양평화론의 골자이다. 이러한 그의 구상은 100년의 시간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중근이 쏜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였고, 이를 전 세계에 고발함으로써 동양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그의 대의였다. 하지만 그가 서거하고 105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여전히 분단국가이며, 동양 3국 운명공동체는 소원하기만 하다. 이번 광복절을 맞아 하루만이라도 안중근의 사상, 그리고 그가 꿈꾸던 평화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sharp229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