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민주화의 큰 별, 박형규목사 별세..
사회

민주화의 큰 별, 박형규목사 별세

김현태 기자 입력 2016/08/19 08:15

[뉴스프리존= 김현태기자] '길 위의 목사'로 불릴 정도로 민주화운동에 평생을 바친 원로인, 박형규목사가 별세했다. 강진에서 칩거하다 최근 정계복귀 수순을 밟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손학규 전 상임고문이 별세한 '민주화운동 역사의 산증인' 박형규 목사의 빈소를 찾았다.
 
고인이 '길 위의 목사'로 불릴 정도로 민주화운동에 평생을 바친 원로인데다, 손 전 고문은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할 정도로 평생을 멘토로 삼아왔던 만큼 부음을 접하자마자 강진에서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별세한 '민주화운동 역사의 산증인' 박형규 목사의 빈소를 찾았다.

손 전 대표는 "제가 군을 제대하고 복학하고 찾아간 서울제일교회헤서 박 목사님은 반유신운동의 선봉 역할을 하고 계셨다"면서 고인이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고 자신에게 목회자의 길을 권했던 일 등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제 청년기 이후의 삶을 결정해주신 분"이라며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셨고 기독교를 민주화운동에 선봉에 서게 한 선봉장"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 사회에 어른이 돌아가셨다"며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덧붙였습니다.

손 전 대표는 "지금은 나라가 총체적 위기"라며 "사드 문제로 국론이 분열돼 한반도가 새로운 분쟁의 중심지가 되지 않을까 염려해야 하는 실정"이라고도 밝혔다.

이어 "우물에 빠진 돼지같은 형국에서 탈출해야 한다"며 "우리 국민은 위대한 에너지와 정신을 가진 국민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주는 데 저도 역할을 하고자 한다"며 정계복귀 이후의 각오를 내비치기도 했다.

강진에서 상경한 손 전 상임고문은 5일장이 치러지는 동안 빈소를 지킬 것으로 알려졌다.

박형규 목사는?

▲ 18일 소천한 박형규 목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2013년 4월3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민청학련 39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함세웅 신부, 한승헌 변호사, 이철 민청학련계승사업회 공동대표(왼쪽부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평범한 목회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박 목사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4·19 혁명이라고 한다. 당시 30대였던 박 목사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총소리와 함께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들것에 실린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선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를 떠올렸다고 한다. 세계적인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말처럼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한평생을 길 위에서 실천하는 신앙을 펼치는 적극적인 그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 목사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여섯 차례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경남 마산 출생의 박 목사는 부산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1959년 도쿄신학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3년 미국 유니언신학대를 수료했다.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 공덕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1971년부터 1992년까지 서울 제일교회 목회 활동을 끝으로 은퇴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을 맡는 활동 등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다.

박 목사는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참여한 뒤 교회갱신운동을 벌이고,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맡아서는 ‘한국의 복음화’라는 구호와 목표를 ‘기독교의 한국화’로 바꾸는 일대 혁신을 시도했다. 도시빈민 문제를 계기로 ‘교회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선교’로 나아갔다. 개인의 구원 중심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회 전체의 구원, 즉 정치·사회·경제 등 총체적 구원을 목적으로 삼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장일 때는 <인권소식>을 발간해 교회가 언론의 구실까지 담당했다.

가장 혹독했던 시련은 그가 72년부터 목회를 맡은 서울제일교회 박해 사건이었다. 83년 예배 방해로 시작해 장장 6년간 노상예배로 내몰렸던 그는 총 60시간에 걸친 감금에 살해 위협, 백주의 테러까지 당했다. 하지만 서울 오장동 제일교회 근처에서 신자들과 함께 모여 중부경찰서 앞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십자가 행진’을 하면서 노상예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이자 시대의 아픔을 나누는 광장이자 민주화운동의 현장이 되었다.

1973년 4월 유신체제를 비판한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징역 2년, 그 다음해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에선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또 1975년에는 서울시경이 꾸며낸 ‘선교자금 횡령 및 배임 사건’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다음해에 다시 박 목사를 잡아넣은 독재 정권은 박 목사를 ‘기독교에 침투한 빨갱이’로 몰아 제거할 공작을 치밀하게 진행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2년 뒤,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주 시위 사건으로 또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박 목사는 1979년 7월17일 제헌절 특사로 풀려났다. “불의한 시대에 성직자가 감옥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박 목사는 생전에 이야기했다. 장례는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은 22일 오전 9시다. (02)2072-2020.
kimht1007@gmail.com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