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생 A씨는 스터디 모임 일원인 B씨(여)와 술을 마신 뒤 B씨 집에서 성관계를 맺었다. 다음날 B씨는 A씨가 수면제를 먹여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성폭행했다는 내용의 고소장을 제출했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A씨는 순식간에 성범죄자로 내몰렸다. A씨는 성관계 직후 두 사람이 나눈 문자 내용과 B씨의 혈액에서 수면제가 검출되지 않은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A씨는 B씨를 무고죄로 고소했고, B씨는 실형 10개월을 선고받았다.
벼농사를 짓는 농민 C씨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이웃과 동네 식당주인 등 41명을 무차별적으로 고소했다. “볏짚을 훔쳐갔다” “경운기를 고장냈다”는 이유에서다. 형사고소뿐 아니라 거액의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조용하던 농촌마을은 풍비박산 났다. 검찰 조사 결과 C씨가 합의금을 받아내기 위해 악의적으로 거짓말한 사실이 드러났다. C씨는 무고죄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같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무고 범죄가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에 접수된 무고 사건은 최근 5년간 연평균 9300여건에 이른다. 다른 사람에게 악의적으로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짓 고소·고발이 남발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범죄 친고죄 폐지로 무고 사범↑
무고 범죄는 특히 성범죄 사건에서 많다. 성범죄가 2013년 6월 친고죄 적용 대상에서 빠지면서 성범죄 관련 무고 사건이 급증했다. 신고자 의사와 상관없이 수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되면서 허위로 신고해 누명을 씌우려는 시도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배우 박유천 씨(30)와 이진욱 씨(35)는 지난 6월과 7월 각각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을 무고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경찰관을 상대로 한 무고 범죄도 있었다. 지난해 모델 지망생 D씨(여·31)는 서울 시내 한 모텔에서 성매매를 하던 중 경찰 단속팀에 적발됐다. D씨는 단속 경찰관 E경장에게 앙심을 품었고 ‘E경장이 단속 과정에서 때리고 400만원 상당의 달러를 빼앗았다’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검찰이 단속 현장 녹음 파일과 모텔 직원 등의 진술을 확보하면서 D씨는 무고죄로 처벌받았지만, E경장은 하마터면 강도상해범 전과가 남을 뻔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4년 발생한 2만9863건의 성범죄 사건 중 무혐의로 불기소된 사건은 4993건으로 17%에 달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일부에선 성범죄 사건의 30%가량이 상대방을 처벌받게 하거나 합의금을 받아내기 위한 무고라고 본다”며 “성범죄 사건은 합의하에 성관계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찾기 힘들어 전적으로 여성의 진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경제적인 이득을 목적으로 고소를 남발하는 사례도 끊이지 않고 있다. 김정원 JKL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단순히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해서 무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는 경제적인 이득을 목적으로 소송을 남발한다”며 “수사기관의 조사로 무고죄가 적발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묻지마 고소’ 남발…처벌 강화
사법기관도 무고와 위증 등 거짓말 범죄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거짓말 범죄가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하고 국가 수사력을 낭비할 뿐 아니라 사법적 정의 구현 절차를 교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고죄는 10년 이하 징역이나 15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중범죄임에도 과거엔 벌금형 수준의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최근에는 무고죄로 실형을 선고받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1심 재판에서 징역형(집행유예·벌금형 제외)을 선고받은 비율은 2011년 18.3%에서 2015년 21.4%로 높아졌다.
지난해 법원은 말다툼 이후 앙심을 품고 상대방을 상해죄로 고소한 무고 피의자에 대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는 상대방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낸 뒤 ‘얼굴과 머리를 수십 대 맞았다’고 거짓 고소했다.
김영란법 시행되면…
다음달 28일부터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소송이 급증하고 무고 사건도 크게 늘어날 것이란 게 법조계 전망이다.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역시 성범죄와 마찬가지로 신고가 들어오면 지체 없이 수사에 들어가야 하는 비(非)친고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강경훈 YK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신고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어 비친고죄 사건에서 무고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공직사회에선 연말 인사철마다 난무하는 비위행위를 고발하는 투서가 난무하고 있다. 승진심사나 인사이동을 앞두고 경쟁상대가 김영란법 위반 행위를 저질렀다고 신고해 수사나 감사를 받게 하는 것만으로도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 행정자치부의 ‘공직비리익명신고시스템’에 올라온 407건의 비리 신고 중 단 2건만 실제 비리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에도 1000여건이 넘는 비리 신고가 들어왔지만 확인된 건 80여건에 그쳤다.
한 경찰서 수사과장은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관련 고발 사건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무고 사건에 대한 수사권 낭비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