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2015년) 초,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핵발전소 월성 1호기의 가동 연장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30년의 설계 수명을 마친 고리 1호기가 10년의 수명 연장을 받았던 2007년만 하더라도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지 않았다. 2011년 일어난 후쿠시마 사고는 한국의 핵발전소 문제에 대한 경고음이었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탈핵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독립적인 핵 규제 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월성 1호기의 수명 연장 심사가 큰 주목을 받았던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많은 시민들은 일본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고가 한국에서도 재연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정부나 전문가들이 "국내 원전은 안전"하다는 말을 되풀이할수록 불신은 커졌다. 지금까지 소수의 관료와 전문가 집단의 고유 영역으로만 생각되던 핵발전소 문제가 나의 문제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월성 1호기 수명 연장에 반대하는 여론은 우세했다.
'원자력(핵에너지) 전문가'들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위험을 과장하는 비전문가들의 의견은 배제하고 전문가 견해에 귀를 기울여야"한다며 노골적으로 시민 단체나 주민들의 의견을 폄하했다. 더 나아가 "전문가가 자신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안전을 걸고 거짓말을 하거나 도박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괜히 나서지 말고 "전문가들을 믿어라"는 논리다. 결국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월성 1호기 수명 연장을 표결로 강행 처리해 승인했다(표결에 의한 강행 처리는 최근 신고리 5, 6호기 승인 과정에서도 반복됐다).
전국적으로 탈핵과 에너지 전환 운동이 과거에 비해 매우 다양하고 활발해졌지만, 정부나 전력 산업계는 여전히 낡은 에너지 시스템 속에 강고하게 갇혀있다. 우리 사회가 에너지 문제와 관련해 크게 갈라져있는 까닭이다. 핵발전소와 석탄 화력 발전소 그리고 송전탑의 횡포와 그에 맞선 저항이 계속되고 있지만, 정부는 '갈등'을 중재하기보다는 교묘히 기업 뒤에 숨거나 '배후 세력'을 찾아 색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바쁘다.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시민을 위한 에너지 민주주의 강의]는 이런 '경성 에너지 시스템'을 넘어서기 위해서 '에너지 시민'이 늘어나야 한다고 설명한다. 에너지 시민은 좀 더 싼값에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는 '합리적' 권리를 요구하는 수동적 소비자로 남지 않는다. 에너지와 기후 변화 문제를 인식하고 사회 변화를 위한 능동적인 행동에 나서는 시민을 의미한다. 가령, 환경 비용을 반영하는 에너지 가격 인상까지 받아들이거나 태양광 발전과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 생산에도 참여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사실 새롭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많은 시민들은 점차 안전한 사회와 더 나은 경제 시스템 그리고 에너지 전환을 비롯한 삶의 중요한 문제를 정부나 기업에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움직이고 있다. 올해 미세 먼지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석탄 화력 발전소가 추진되는 여러 지역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저항이 크게 일어났다. 태양광 발전을 자기 집이나 마을에서 함께 늘려나는 시민들의 노력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며, 더 나아가 재생 가능 에너지 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국가 사무'라며 정부가 독점해오던 에너지 정책을 분권화하고 지역 차원의 에너지 전환 계획을 세우고 이행하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도 본격화됐다.
그런데도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뒤죽박죽되어 있고 에너지 관련 문제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은 에너지 시민이 부딪히는 어려운 장벽이다. '정부 3.0'이라며 정부 기관의 개방성과 투명성이 나아진 듯 강조되지만, 여전히 에너지 분야의 주요 정보와 자료는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렵거나 정보 공개를 청구해도 '기업의 영업 비밀 보호'라는 명목으로 차단되기 일쑤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보이고 시민들이 스스로 행동하거나 개입하기 어려워 보일수록 참여에 의한 에너지 전환은 더뎌질 것이다. 문제를 더 훤히 드러내고 사회적 논쟁이 일어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역할도 매우 유효하고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시민을 위한 에너지 민주주의 강의>는 에너지 민주주의를 위한 사유와 실천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안내하는 유용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에너지 문제를 중심으로 기후 변화, 불평등, 평화, 정치, 일자리 그리고 대안에 대한 모색까지 에너지 시민을 위한 교양을 두루 담아서 입문자를 위한 교재로 삼기 좋을 것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1부 '상황'에서는 에너지 과잉과 빈곤이 공존하는 현재 사회의 모습과 기후 변화 위기를 둘러싼 현황을 다뤘다. 특히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7퍼센트인 한국에서 벌어진 '자원 외교의 저주'를 조망하고 자본과 국가 중심이 아닌 사람과 지역 중심의 대안적 에너지 안보 개념을 소개한다.
2부 '쟁점'에서는 기업 편향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에너지 정치의 원리를 분석하면서 '화석연료-핵에너지 카르텔'을 해체하는 녹색 에너지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탈핵과 기후 정의 운동부터 지속 가능한 경제와 녹색 일자리까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꾸준히 다뤄왔던 쟁점을 정리했다. 한반도의 지속 가능한 에너지 체계를 위해 남북 재생 가능 에너지 협력을 비롯한 접근을 주문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3부 '대안'은 에너지 전환에 대해 단지 에너지원의 변화뿐 아니라 분산적 에너지 생산-소비로의 재편과 에너지 이용자의 행동과 규범의 변화를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지금의 복잡하고 닫힌 에너지 정책 결정 구조에서 시민 참여의 방안은 가장 큰 숙제다. '시민을 대변하는 전문가'의 역할에 맡길 것인가. 그보다는 "전문가는 시민의 대리자가 아니라 시민 참여를 손쉽게 하고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돕는 조력자"로 봐야 하며 "강한 민주주의와 좋은 전문성이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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