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1988년 처음 ‘금배지’를 달았습니다.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회에 첫발을 내딛은 초선의원 노무현의 활약상은 이미 유명합니다. 첫 대정부 질의에서 참담한 노동현실을 질타해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총재와 동료의원들로부터 박수를 받는가 하면, 국회 노동위에서는 이해찬·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활약했습니다. 5공비리 청문회에서 예리하고 속 시원한 질의를 해 전 국민에게 혜성처럼 나타난 ‘청문회 스타’로 주목받았습니다.
노무현의 등장은 그러나 ‘갑작스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노무현의 시작> 제3장 ‘노동 현장에서’는 부림사건 이후 인권변호사가 된 ‘노변’이 노동사건 변론을 통해 겪는 두 번째 각성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전태일의 외침이 귀에 쟁쟁하던 시절 부산, 마산, 창원, 거제 등 경남 전역을 아우르며 신발공장, 기계공장, 조선소, 버스회사 노동자들을 위해 불철주야했던 법정 안팎의 모습이 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까지 펼쳐집니다.
전태일을 만나다
잔업은 기본에 특근에 연장근무, 철야까지 해도 생계가 빠듯한 임금. 80년대 초 독재정권하에서 생존을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던 이들에게 돌아온 건 용공혐의와 구속, 전원 해고와 폭력진압이었습니다. 당시 여러 수소문을 한 끝에 때로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부산의 노동법률상담소를 찾은 구술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쭉 하니까 노 변호사가 ‘왜 노조를 결성했나?’이래요. ‘아니, 근로기준법도 안 지키고 너무 열악하고’ 이런 설명을 했죠. … 근데 이야기를 쭉 들으시더니 ‘에이 그럴 리가 있나, 현장이 사람 사는 덴데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나’ 그래가지고, 진짜라고 이야기하면서 설득하느라 자주 만나서 이야기했죠. … 그때는 노동사건을 처음 맡아봐 갖고 말을 해도 잘 못 알아듣고 법도 그런 게 있는지 잘 모르시고. 우리는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몰라도 법은 많이 알죠. 근데 변호사님은 소송법은 잘 아는데 어째 노동법은 전혀 모르시더라고.” (이재영)
“‘왜 노동운동을 하게 됐냐? 서울대 상대까지 나와 가지고’ 그렇게 물어보시는 거죠. … 노무현 변호사가 와서 본인부터 끊임없이 궁금해 했던 것이, 왜 이 사람이 서울 상대까지 나와 가지고 노동운동을 하게 됐는지였던 것 같아요. 그 전에 부림사건 변론도 하고 YMCA 활동도 했지만 노동 관련은 처음이니까. 저는 ‘전태일 보시라’고, 본인도 그걸 읽어보시고 ‘재판장한테도 한 권 가져다주고 검사한테도 하나 가져다줬다’ 그러고 그 책을.” (문성현)
두 번째 변화의 시작
크게 충격을 받은 노무현은 법을 새로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노무현과 해고 노동자들은 그저 법정에서 만나는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삶과 생각을 이해하고 나누는 친구였고, 서로를 가르치고 성장하도록 변화시키는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변호인 노무현에 대한 기억에는 인간 노무현에 대한 기억이 따라옵니다.
“실제 이분은 굉장히 좋은 변호사였어요. … 굉장히 적극적으로 형을 어떻게든 안 받게, 아니면 적게 받게 하고자 하는 그런 노력을, 정성을 쏟으시더라고요. 그게 굉장히 고맙게 느껴졌어요. 그때 나는 가족이지만 법정투쟁, 그러니까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도 다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어떻게 의미 있게 되도록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 변호사님은 어떻게든 빼내고 싶어서 판사한테 가서 뭔가 호감을 서로 주고받으려는 노력도 하시고, 제가 그런 걸 봤을 때 ‘이분은 내가 모르는 변호사로서의 역할에 정말 충실하고 계시구나’…” (이혜자)
“다른 사건도 그러셨는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 사는 데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셨어요. ‘뭐 먹고 사노’ 이래싸면서. 듣기로는 그때부터 변호사님이 버스를 타고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를 만나면서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데’ 이러면서 차를 처분했다고 들었어요.” (이재영)
“저희가 가면 꼭 점심을 사주시더라고요. 변론도 다 미뤄버리고 저희하고 이야기하고 또 연말이 되니까 망년회도 시켜주시는데, ‘변호사님 이래 노동자들 쳐다보고 무료 변론하시고 그러면 변호사 사업이 안 어렵습니까?’ 이러니까 ‘참, 옛날에는 내가 부산에서 변호사 랭킹 1~2위를 했는데 요즘에는 완전 꽁지’라고 말씀하시데요.” (조준식)
약속을 지킨 사람
“민주주의를 자기 한 몸 기꺼이 내던지는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을 기만하지 않는 정직하고 공평하고 정의를 목숨처럼 존중하는 당당한 국민의 대변자로서 부끄럼 없는 그런 정치인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
88년 출마 당시 노무현이 직접 쓴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출사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편에 걸쳐 소개한 구술자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이 이어져 노무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이 책은 노무현에 대한 기록이자 그의 꿈과 열정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기적인 삶의 껍질을 벗어던진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 변화의 기록입니다. 이후 그의 삶의 굵은 궤적은 변함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분위기가 익사이팅(exciting) 해지니깐 변호사님 성격대로 지나가는 말투 비슷하게 ‘아, 나도 마, 상훈 씨처럼 젊으면 길에 나가서 한판 붙어버리고 싶어’ 그런 식으로 [웃음] 말씀하시더라고. 그래서 웃고 말았는데, 1~2년 지나니깐 부산에서 싸움 나면 변호사님이 최고 앞장서신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하시는구나, 나중에 생각했지요.” (장상훈)
“노무현 변호사께서 왜 정치를 하게 됐나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딴 데 안 가고 노동위원회를 하잖아요. 나중에 환노위(환경노동위)가 되는데, 거기서 열심히 하시고 그 뒤로도 민주당 내에서 현대자동차 사건이 있을 때 책임 맡으시고 한 걸 보면, 정치라는 걸 통해서 일정하게 노동문제 쪽에 해야 될 역할이 있다, … 내 위치에서 노동자와 함께 살겠다, 그 말씀을 분명히 하셨거든. … ‘그럼 내가 내 위치에서 이 노동자들을 위해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치를 생각하셨을 거야, 지금 와서 보면.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게 뭐냐? 정치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문성현)
“정치에 입문하실 때 말도 많았잖아요. 거제 지역뿐이 아니고 마산, 창원, 진주 전부 다 반대했죠. 이쪽에서 따르는 분들은 지금까지 재야운동권에 있다가 기득권에 들어가서 변질되는 사람이 많더라, 그래서 반대를 많이 했는데요. 변호사님께서는 ‘지켜봐 둬라. 절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약속을 지키셨죠.” (김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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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재단 첫 구술기록집, 바로 지금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각 사이트에서 다양한 선물을 드리는 이벤트도 진행 중입니다. 서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19일 퀴즈의 정답을 맞춰주신 분 가운데 당첨자는 ‘화양연화♡’, ‘jinoo’, ‘freeker’, ‘생명우선’, ‘Remiel’ 님입니다. 개별 연락드린 후 발송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분들이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노무현의 시작>을 만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노무현의 시작이 깨어있는 시민의 시작으로, 우리의 시작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퀴즈입니다. 정답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추첨 결과는 6월 3일 본 게시물 댓글로 공지 후 개별 통보드립니다.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뛰어든 노무현 변호사는 이 사건으로 노동쟁의 조정법상 제3자 개입금지 및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된 민주화 운동 열사의 이름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