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김현태기자] 백범 김구를 생각하며 기념관을 찾았다. 첫눈에 들어오는 호랑이 상 김구
2016년 광복절 71주년를 보내는 8月 임정을 이끌었던 김구선생을 만나는 좋은 시간을 갖고자 한다. 경교장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사적 465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들에게 흔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집무실과 숙소로알려져 있는 곳이고. 또한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서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1938년 금광으로 많은 돈을 벌었던 최창학에 의해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건물을 보면 1930년 대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을 볼 수 있다.
2013년 3월 다시 복원될 때도 당시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자 했다.
경교장은 당시 대한민국의 건국과 통일을 주도할 때 중심이 됐던 건물이다.
서대문 경교장으로 불렸으며,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지의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곳에서 단일정부를 주장함과 동시에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경교장 입장과 관람은 모두 무료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누구든지 관람을 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휴관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경교장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1층에서 만난 귀빈식당
이곳엔 임시정부와 김구와 관련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김구가 서거할 당시 빈소로 사용됐으며, 평소에는 임시정부 인사들이 식사를 하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 모인 임시정부 인사들이 했을 법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
경교장 1층 빈소의 모습도 보인다.
다른 방으로 응접실과 선전부 활동 공간 등이 위치해있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아 많아 더 실감 났다.
경교장 지하로 갔다.
지하에서 임시정부 관련 물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임시정부 당시 사용됐던 문서, 기사, 편지 등이 전시돼 있었고, 임시정부의 역사와 민주주의에 대한 읽을거리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8년 8월 15일 수립을 선포한대한민국정부로 그 법통이 계승되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뿌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연호를 대한민국으로, 태극기와 애국가를 그대로 사용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경교장이 걸어온 길도 만날 수 있었다.
이후 경교장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건물을 지었던 최창학에게 반환됐고, 이후 타이완 대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1967년 삼성에서매입 후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시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과정을 거쳤다.
김구가 서거할 당시 입고 있었던 옷도 전시돼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당시의 물건이 있다는 것이 참 의미 있는 것 같다.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의 모습이 지금과 사뭇 다르다.
2층엔 김구의 침실과 집무실이 위치해있다.
김구와 국내 정상들이 이곳에서 회의를 하기도 했다.
중앙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숙소가 있다.
일본 가옥의 형식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교장을 통해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상해 임시정부의 문지기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라는 이름을 접하면 대한독립과 통일정부를 연상하게 된다. 그의 삶과 행동이 철저하게 이 두 가지 일에 결부되어 있고, 이 두 가지 일을 위해 끈기와 집념을 불태우다가 비명에 죽었기 때문이리라. 백범은 의사와 열사, 정치가와 혁명가의 행동과 신념을 보였으나 끝내 이 모든 이름을 아우르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남게 되었다. 그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김구는 황해도 해주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스스로 ‘상놈’이라 했고, 호도 이런 의미에 따라 지었다. 그런 탓인지 19세 때에는 동학의 지역접주로서 황해도 일대의 포수를 이끌고 황해감영 공격에 나서서 반봉건 반침략의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다. 이 일로 그의 본명인 김창수(金昌洙)가 일제에 알려졌고, 그 뒤 계속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줄기차게 의병항쟁에 나섰다. 그는 교육계몽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본 장교를 살해한 죄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탈옥하여 중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김구는 20대에 열혈청년의 기개를 한껏 과시했다.
그의 나이 30에 접어들자 나라는 더욱 기울어 이른바 을사조약이 맺어졌다. 이즈음 그는 상동교회의 비밀집회에 참석하여 이회영, 이동녕 등의 선배지사를 만난다. 기독교계 인물을 중심으로 신민회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담하여 황해도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때 양기택, 안창호, 이동휘 등의 지도자를 알게 된다.
일제의 감시망 속에 그의 활동이 포착되어 4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농감(農監)이 되어 농사를 지으면서 3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의 7년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조용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그의 생애의 첫 시기가 된다.
백범일지
백범일지
상 · 하권으로 구성된 김구의 친필 자서전으로 임시정부에 관해 알 수 있는 1차 사료이며 독립운동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1919년 민족의 거대한 힘이 분출되었다. 온 민족의 역량을 보여준 3·1운동을 계기로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창설되었다. 그는 뒤늦게 15명의 동지를 이끌고 상해의 임시정부 청사로 찾아갔다. 이때 그의 동지 안창호가 내무총장을 맡고 있었는데 김구는 그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나는 실력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 뿐더러 감옥에서 청소를 할 적에 내가 하느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번 우리나라 정부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으니 임시정부의 정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
그리하여 원래 직제에는 없는 경무국장이 되어 우람한 몸으로 청사의 문을 지키고 요인을 보호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 뒤 약 25년 동안 그는 임시정부 주인 역할을 맡았다.
중경임시정부 청사
중경임시정부 청사
김구는 임시정부의 문지기 노릇을 시작으로 25년 동안 봉직했다. 비록 궁벽한 중경으로까지 임시정부를 옮겨야 했지만 그의 투쟁은 지치지 않았다.
그는 5년 동안 문지기 노릇을 했다. 임시정부의 자금이 넉넉했던 초기, 많은 인사들이 모여들 적에 그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임시정부를 지켰고, 때로는 밀정을 가려내는 심문관 노릇도 했다. 임시정부에 자금줄이 끊어지고 그 많던 인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간 뒤에는 내무총장을 맡아 입각했다. 별 볼일 없는 시기에 치안 책임자를 맡은 것이다.
임시정부가 계속 분열과 혼돈을 보이자 그 돌파구로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없애고 국무령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몇 사람의 국무령을 거친 뒤 1926년 마침내 그가 국무령 자리에 앉았다. 김구는 4개월 정도 이 일을 보았을 뿐인데 최고 지도자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고, 연이어 주석제로 바뀌었을 적에는 내무장 주석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지도자들이 임시정부에서 떠나가 사람이 없었던 데에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고 1931년 만주사변과 만보산(萬寶山)사건이 터져 중국 사람들의 감정이 격화되어 임시정부활동이 부진했다. 특히 계급혁명을 들고 나와 임시정부 중심세력과 이념적 갈등을 빚고 있던 공산계열과 그 지원자였던 소련의 볼셰비키정권에 대해 그는 고집스럽게 증오심과 적대감마저 보이며 한국독립당을 창당했고, 임시정부 활동의 부진을 메우려고 특수공작을 결행할 수 있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해서 김구 주도로 이봉창 의사가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가 벌어졌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던진 폭탄으로 중국 주둔 일군의 수뇌부를 제거하는 의거가 일어났다. 이 두 사건은 그의 존재와 임시정부의 실체를 널리 알린 유명한 사건이었다.
배후 인물로 김구가 지목되어 일제 당국은 막대한 현상금을 그의 목에 걸고 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김구의 이름은 국내와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 개인적 정치적으로는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김구는 하루아침에 일급 독립운동가, 거물급 정치인으로 부상한 것이다. 김구는 몸을 숨겨야 하는 다급한 처지가 되었다.
그의 활동에 힘입어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지원이 늘어나고 한국 학생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교육하는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더욱이 만주사변 이후 중국인의 반일 열기가 가속되어 한중 유대가 강화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이 무렵 중국 관내의 민족해방운동 단체를 결집시키려는 노력이 일어나 1932년 김규식, 김두봉(金枓奉) 등에 의해 대일전선통일동맹이 조직되었다. 여기에 한국독립당, 조선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등의 간부가 참여했다. 이 동맹이 조직된 뒤 구체적인 활동이 없자 1934년 완전한 대한단결 조직체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벌어져 위의 네 정당을 포함, 대동독립당 등이 해체하여 들어오고 중국과 미주의 교민단체까지 규합하여 민족혁명당을 발족시켰다.
민족혁명당은 민족통일전선을 모색하고 조소앙이 제창한 삼균주의(三均主義) 곧 민족의 자주독립 추구, 민주공화국 건립, 평등한 경제제도 건립에 그 이념적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은 이 두 가지 일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가담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혁명운동을 할 때 역량 결집보다는 투쟁이 중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노선을 견지하기 위함인지 김구는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을 만나 협조를 얻어내기도 하고 민족주의 우파의 역량을 확대하여 새로운 한국국민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모택동의 공산당과는 적대감마저 보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연합체 결성을 도모하여 그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장에 조선혁명당계 당원인 이운한(李雲漢)이 돌입하여 권총으로 김구를 향해 저격했다. 그는 탄환을 맞았으나 용케 살아났는데, 이 탄환은 평생 그의 몸에 박혀 있었다고 한다. 이때 우파는 일단 연합회를 결성했다.
중일전쟁 이후 김구는 계속 일본군에 쫓겨 이전하던 임시정부를 마지막으로 궁벽한 중경으로 옮기고 장개석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이때에 와서는 그전과는 달리 좌우합작을 모색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이때의 합작모색은 그의 운동노선에서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완전한 독립, 민족의 통일
김구는 중경에서 마침내 김원봉 등과 손을 잡고 합작을 이룩해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한편 미국 OSS와 합작으로 광복군 특공대를 조직하여 국내 진공을 계획했으나 끝내 결행하지 못했다. 그의 통한은 바로 광복군을 승리의 군대로 조국 땅에 상륙시키지 못한 것이요, 또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승전국 정부가 되어 귀국하지 못한 것이다.
김구는 임시정부에 정통성이 부여되기를 바랐으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개인 자격으로 만강의 비분을 안고 해방된 몇 달 뒤 미군정사령관 하지가 보내준 수송기를 타고 김규식, 이시영 등과 함께 귀국했다. 해방조국에 돌아온 김구는 밤낮을 잊고 일에 몰두했다.
첫째, 그는 임시정부의 법통성(法統性) 확인에 전력을 기울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들어왔으나 한때 미군정을 접수하려 해서 점령군사령관을 놀라게 만들었고, 점령군사령부는 임정요인을 처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김구는 처음 한민당계가 임시정부가 정부의 기능을 맡아줄 것을 건의하는 것에 고무되었으나, 인공계와 공산당계의 거부로 좌절되었다. 김구는 불만에 차 이렇게 선언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임시정부는 결코 모일계급(某一階級), 모일파(某一派)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통한 이해입장에 입각한 민족단결의 정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전 민족이 총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에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데 있습니다.
- 〈임시정부개선 환영대회 답사〉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임정은 여러 현실적 사정과 정치적 이해에 얽혀 그 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것이 임시정부의 한계였다. 김구는 계속 그가 거처하는 경교장을 임시정부 청사처럼 꾸미고 국무회의를 소집하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둘째,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를 일정기간 위임통치하게 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김구는 즉각 이를 반대하여 반탁을 들고 나왔다. 그는 반탁운동이 독립운동으로 재출발되어야 한다는 것과 신탁안이 완전 취소되고 자주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반대운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산당계와 중도좌파계가 찬탁을 표명하자 김구는 늘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던 이승만과 반탁에서만은 완전히 뜻을 같이했다.
셋째,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통일정부안이 실현되지 못하자 유엔에서 남한만의 총선거로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이를 환영했으나 백범은 “나는 한국을 분할하는 남한 단독선거도 북한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잡고 남북통일에 최후까지 노력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단독정부반대운동을 펴기 위해 홍명희, 김창숙 등과도 손을 잡았고 끝내 그 일이 어려워지자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넘어갔다.
38선을 바라보는 김구
38선을 바라보는 김구
“나는 한국을 분할하는 남한 단독선거도 북한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잡고 남북통일에 최후까지 노력하겠다.”고 외쳤던 그가 조국을 가르는 38선을 바라보고 있다.
김구는 평양에서 김일성, 김두봉과 만나 의견을 나누었으나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고 정권욕을 채우려는 자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없었다.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으니 빈손으로 돌아온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내 그의 계열이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1948년 5·10 총선거가 이루어져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김구는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회한의 나날을 보내던 중 한 암살자의 총에 쓰러졌다.
그가 암살된 것은 너무나 큰 민족적 비극이지만 그 개인사로 보면 커다란 정치적 소득을 얻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의 의지와 정열이 민중에게 더욱 커다랗게 다가갔고 동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를 통해 그를 역사인물로 존경하는 이미지가 제고된 것이다. 이 죽음은 홍구공원의 거사 성공보다 훨씬 더 큰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김구는 중국땅에서도 순수하고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탓으로 좌우합작이나 통일전선에 미온적이거나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해방공간에서는 때로 민족주의우파의 단결을 모색하기도 하고 때로는 좌우합작을 도모하기도 하다가 마침내는 위험을 무릅쓰고 북으로 넘어가 김일성과도 만났던 것이다.
그의 통일정부 수립 노력에 새롭게 역사적 의의가 주어지고 있다. 정치가들 가운데 다수가 존경하는 인물로 그를 꼽고 있으며 일반인의 역사인물 인기도 조사에서도 늘상 그는 첫 자리를 차지한다.
kimht100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