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기획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안데레사 기자 sharp2290@gmail.com 입력 2016/09/18 09:35

▲ ▲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조지오웰이 1945년에 발표한 소설.



1.한국의 청소년에게 독서과제로 가장 많이 부과되는 작품이 『동물농장』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실로 뜻밖이었다. 과연 러시아 혁명사를 몰라도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거의 한 세기 전 러시아 역사에 어떤 학생이 관심을 가질까? 더더구나 그 땅에 공산주의가 망해버린 이 시점에 말이다. 과제를 내주는 선생은 과연 학생들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갖가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유를 짐작할 듯도 하다. 왜 이 땅에서 노골적인 독재가 물러간 후에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여전히 즐겨 읽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답을 절로 깨칠 것 같다. 두 작품 모두 공동체와 권력의 속성,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꿰뚫은 수작이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이 붙인 당초의 제목에는 『'동물농장』에 더해 『우화』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Animal Farm: A Fairy Story)이었다. 그러나 아동용으로는 시장이 불투명하다는 출판사의 판단으로 부제가 빠졌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의 통념으로는 이 작품은 전형적인 동화 내지는 우화의 기준에 맞지도 않았다. 마술, 예쁜 공주, 씩씩한 왕자, 해피엔딩, 그 어느 것도 없다. 굳이 우화적 요소를 찾아낸다면 비참한 복서의 죽음과 암말 몰리의 무모한 허영 정도일 것이다. 또한 아동용 우화라면 동물과 인간 사이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게 상식인데 이 작품에서는 등장 캐릭터 거의 전부가 불행한 파멸로 끝난다. 모든 의미에서 어린이용으로 적합하지 않은 작품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알만한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읽을 책이다. 『동물농장』은 볼테르의 『깡디드(Candide)』(1762)처럼 특정 장르로 분류하기 힘든 복합 문학이다. 정치소설,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우화,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들에 대한 냉소, 정치적 무지에 대한 경고, 이 모든 것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했던 1943년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는 영국에서 일종의 정통정치사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진보주의자는 물론 보수주의자들조차도 친 러시아 성향을 띠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작가 스스로 '사회주의'를 손상할 의도가 없었고 다만 민주적 서방세계에 주의를 환기시킬 의도라는 부연 설명을 했다고 한다. 사상의 자유와 언론, 출판의 자유가 확립된 것으로 자부하는 영국임에도 책을 선뜻 내줄 출판사를 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후세인은 물론 작가 자신에게도 충격이었다. 작가가 쓴 서문이 초판본에 실리지 못한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2.『동물농장』은 1945년 8월 17일에 최초로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1년 뒤에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그때까지 오웰이 펴낸 아홉 권의 저술의 합을 능가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전쟁 직후의 극도로 궁핍한 종이 사정을 감안하면 요즘 말로 엄청난 블록버스터였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연이어 원자탄이 떨어진 직후의 일이다. 오웰이 작품을 집필하던 1943년 11월부터 1944년 2월은 원자탄개발을 위한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가 절정에 달한 시기이기도 하다.

『동물농장』은 '전후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에드워드 리튼(Edward Bulwar Lytton, 1803-1873)의 경구가1) 단순한 허사가 아님을 입증이나 하듯이 지난 60년 동안 『동물농장』은 전쟁의 승리나 원자탄보다 더 깊이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뿌리박은 인류의 문화자산으로 살아있다.

2차 대전 직후는 오웰의 친구이자《Horizon》지의 편집인이었던 시릴 코널리(Cyril Connolly)의 표현대로 "서구의 정원이 문을 닫는 시기"로 문예사조가 크게 변하고 있었다. 한때 위세를 떨치던 모더니즘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운동의 주도자들이 전쟁에서 죽기도 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전쟁 중 내린 정치적 선택 때문에 운신의 폭이 줄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피사의 미군감옥에서 반역죄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 중에 조국을 배신하여 무솔리니의 선전에 앞장선 혐의였다.

좌파 작가들도 분열과 혼란을 거듭했다. 오든(W. H. Auden)의 급격한 방향전환에서 보듯이 문학인들은 마르크스를 '실패한 신'으로 규정했다. 오웰은 종합에세이, 「고래 뱃속에서」(Inside the Whale) (1940)에서 오든의 시, 〈스페인 (Spain)〉의 구절, '필요한 살인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는 자세'2)를 비판한다. 이 시에서 오든은 1937년 내전 중인 스페인의 모습을 "어제의 위대한 미덕이 오늘의 재앙으로" 그린 것이다.3) 고래 뱃속의 요나처럼 자신을 고래 아가리가 삼키도록 방치했고, 뱃속에 감금되어서도 저항을 포기한 채 암담한 상황을 수용하는 문학인의 무력한 자세를 강하게 질책한다.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서 말했듯이 앞선 두 세대 문학인들은 오염되었고, 진실과 현실에 호소하는 새로운 작품에 목마른 독자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동물농장』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영국 최초의 '전후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단지 출간일자 때문만은 아니다. 정면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영국소설이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후의 새로운 도덕적 발견과 정치적 자각을 모색하는 시대정신에 바탕을 두고 억압적 과거사의 영욕을 파헤치는 소설을 기다렸던 대중은 『동물농장』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오웰 스스로 이 작품을 일러 "정치와 예술을 결합하여 쓴 최초의 소설"이라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는 자신의 조국, 영국을 "악한 구성원이 지배하는 가족"4)으로 비유했다. 만약 의로운 후손이 승계한다면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 이는 영국에만 해당하는 물음은 아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 모든 후세인에게 『동물농장』이 남겨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이다.

 


3.『동물농장』은 '반 유토피아소설'이다. 유토피아문학이란 에덴동산으로 상징되는 전설적 황금기에 대한 향수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꿈의 제시다. 플라톤의 『국가』를 비롯한 많은 작품이 이 주제를 다루었지만 『유토피아』라는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1516년 토마스 모어의 라틴어 소설이 효시다.5)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은 유토피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땅 'Nowhere')를 발견한다. 『유토피아』는 1551년 영어로 번역되어 많은 후세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1626), 조나선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 The Gulliver's Travels』(1726)가 대표적인 예이다. 19세기에 들어서 유토피아는 문학과 사회적 실험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영국문학의 경우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의 『에르혼(Erwhon)』(1872)6)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노웨어 뉴스』(News from Nowhere)(1891)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 〈록슬리 홀〉(Locksley Hall(1842)은 인간이 '세상과 연합하여'7) '세상의 비전'8) 을 관조하는 곳으로 그렸다.

미국문학에서는 에드워드 벨라미 (Edward Bellamy)의 『뒤돌아보기』(Looking Backward)(1888), 허만 멜빌 (Herman Melville)의 타이피 『Typee』(1846)와『오무』(Omoo) 1847)등이 오염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담은 유토피아소설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유토피아는 서부개척시대의 '변경' (frontier) 개념과도 연결되어 있다. 서부는 각종 죄악과 피의 투쟁으로 얼룩진 유럽과 그 연장인 동부의 역사에서 탈출하여 자유와 평화 공존의 이상이 실현되는 시적인 사회를 의미했다. '미국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의 『헉클베리 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이 대표작이다. 문명사회를 등진 핀과 도주노예 짐이 뗏목 위에 건설한 평화로운 공동체는 지상의 유토피아다. 그 꿈이 무너지자 작품의 말미에 헉은 새로운 유토피아, 변경을 찾아 서부로 떠난다. 기독교적 인본주의를 거쳐 산업사회의 낙관주의가 절정에 달한 19세기에 많은 사람들은 완벽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유토피아의 현실적 가능성을 믿었다. 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나라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혁명과 내전, 전쟁과 냉전으로 일관했고 전체주의 체제의 등장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혔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한 반 유토피아 작품은 인간의 탐욕과 기계화가 불러들일 암울한 미래의 재앙을 경고하고 나섰다. 20세기의 3대 반 유토피아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면 '부정적 유토피아')작품으로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더하여 러시아 작가, 쟈마틴(Eugene Jamiatin)의 <우리들>(We, 1924)을 들기도 한다.9)

 


4.라이오넬 트릴링(Lionel Trilling, 1905-1975)은 조지 오웰이야말로 천재가 아닌 것이 다행인 사람, 자신의 심성과 사상에 성실하려다 상처를 입고 그러면서도 끝내 진실되고 성실했던 작가라고 평했다.10) 이병주도 "오웰은 진실 이외의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라고 평했다. (『1984년』서평, 1984) 권력과 탐욕이 불치의 인간본성임을 간파한 그는 아무리 위대한 이상에 충만한 혁명이라도 인간의 생래적 악성을 제어하는 사회제도가 구축되지 않으면 불의의 결과로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진실의 이름으로 경고하는 것이다. "모든 혁명은 실패로 마감한다. 오로지 실패하는 양상이 다를 뿐이다." 그는 대중이 선한 의도로 성취한 혁명은 엘리트 독재계급의 출현과 이들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전락하는 악을 생산한다.'라고 자신이 사는 시대에 분노하고 세상에 항의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다. 김현의 에세이, 〈소설은 왜 읽는가?〉가 연상된다. "이 세상이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 강한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읽는다."고 했다. 독자가 기대하는 소설이 그럴진대, 작품을 쓰는 작가야 오죽하랴. 1942년에 출간된 『20세기 작가사전』11)에서 자신의 항목을 집필한 그는 원고의 말미에 '전쟁으로 절망하여 현재는 절필하고 있음. 그러나 3부로 구성된 장편을 계획 중."이라고 썼다. 그때 구상한 작품이『1984년』이다.

우리 모두 과거 한 때 동물농장이나 매너농장 인근에서 살았거나, 앞으로 그럴 위험 속에 살고 있다. 순수하고도 절실하게 필요했던 혁명이 배반의 독재로 전락하는 것은 단지 정치의 영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공동체 전반에 걸쳐 만연한, 엄연한 살아있는 신화이다. 어떤 권력에나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 폭력과 프로파간다라는 오웰의 주장은 보편적 설득력을 가진다. 호메이니, 가다피, 사담 후세인, 조지 부시, 김정일, 그리고 ... 이미 사라진 정치권력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혁명보다 21세기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숨은 혁명은 대기업 지배의 부르주아 물질혁명이다. 우리네 삶의 실체가 이러할진대 절대 권력의 독재가 사라졌다고 믿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는 동물농장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5. 아주 사적인 소회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나도 이렇다 할 선생이나 안내자 없이 독서를 시작했다.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대로 읽었다. 세상에 대한 신비와 공포가 교착하면서 난독의 습관을 키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대처인 대구에 나갔다 서점에 들려 <어느 개의 고백>이란 걸 샀다.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접어버렸다. 그때부터 동물이 들어가는 작품은 일단 제쳐두었다. 『동물농장』이란 책의 제목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시튼의 『동물기』와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비교적 괜찮았던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도서관에 이 책은 없었다. 실제로 읽은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1984년』을 먼저 읽고 러시아혁명사에 관한 지식이 얕았지만 단초가 보이는 듯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스탈린은 꺼꾸러지다" 라는 포스터가 실려 있는 군사화보를 본 적이 있다. "스딸린 대원수, 김일성 원수"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둔 북한 '괴뢰군' 사령부의 모습도 기억 속에 있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처음 접하면서 적어도 나폴레옹이 스탈린일 거라는 짐작은 할 수가 있었다.

작가 오웰이 '스페인내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을 읽으면서 왜 나의 아버지 세대가 그처럼 스페인내전과 인민전선 사상에 매료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인민대중을 적으로 돌릴 수 없다." 인민전선을 지지하면서 앙드레 지드가 내던진 이 말에 공감한 지식인이 많았다고 한다. 지드의 작품을 탐독한 이병주가 데뷔작 <소설 알렉산드리아>(1965)에 히틀러가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하려는 프랑코 파쇼 세력을 지지하기 위해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을 중요한 삽화로 이용한다. 그는 인민전선 사상이 당시 조선의 지식청년에게 미친 영향을 3.1운동의 좌절과 결부시켜 이렇게 정리했다. "프랑코는 악이고 인민전선은 선이다. 그런데 인민전선 정부는 붕괴한다. 결국 악이 선을 압도한 것이다. 독립을 외친 조선인은 선이고 이를 탄압한 일본정부는 악이다. 중국을 침략하는 일본은 악이고 방어하는 중국은 선이다."

초임 교수 시절에 영국에 1년간 체류한 적이 있었다. 그에 앞서 런던을 수십번 나들이 했고, 도합 네 차례나 영국 전역을 자동차로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중 두 번은 이른바 '문학성지의 순례'가 목적이었다. 옥스퍼드현의 작은 도시(Sutton Courtney, Oxfordshire)의 한 교회(All Saints' Church)묘지에 오웰의 비명을 읽었다. 본명과 생몰일자만 적혀 있었다. 어린 시절에 이 동네 개울에서 낚시한 연고가 있다고 했다. 오웰 자신은 어디에서 죽든 가장 가까운 교회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남겼다. 런던에서 죽었으나 현지 어느 교회에도 묻힐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부인 소냐의 요청으로 오웰의 부자 친구인 데이비드 애스터(David Astor, 1912-2001)가 이 묘지를 주선했다. 애스터 자신도 반세기 후에 친구의 곁에 묻혔다. 20세기 초 영국 정치사의 거물인 아스퀴스 수상(Lord H. H. Asquith, Earl of Oxford, 1906-1914재직)이 이 집단유택(集團幽宅)의 좌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목가적 풍경을 사랑한 그는 영국의 국립영웅묘지에 해당하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대신 이 작은 교회에 안장되기를 고집했다고 한다.

후일, 오웰이 태어난 곳도 들를 뻔했다. 십여년 전에 네팔과 인도의 불교성지를 여행하면서 인근까지 갔으나 일정이 미치지 못했다. 인도 북부 비하르주의 작은 마을 모티하리(Motihari)다. 주의 수도인 파트나에서 170킬로 북쪽 지점이다.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다. 힌두교의 성지, 바르나시의 영향권이다. 부처님의 성도한 불교 인근지역이다. 간디가 비폭력 무저항 사탸그라하 (Satyagrah)실험을 한 곳이기도 하다. 아소카 왕이 건축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불탑, 케사리야(Kesariya)스투파도 인근이다. 오웰도 간디의 찬양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작품의 핵심 구절인 "평등한 동물(사람)과 더욱 평등한 동물(사람)"의 구분은 내가 법학자로서 오래토록 매달린 핵심 화두다. 유학시절에 번역, 출간한 책의 제목은 "법은 누구 편인가"(1985)였다. 원제목은 "대법원 역사에서 부자와 빈자" (The Rich and the Poor in Supreme Court History)였다. 흔히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대성하고, 법원이 나라 전체의 균형을 잡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 사법왕국으로 불리는 미국에서 "부자의 돈지갑과 가난한 사람의 한숨"이 최고법원의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가를 분석한 책이다.
sharp2290@gmail.com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