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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정치인들에겐 기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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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정치인들에겐 기회일까?

김현태 기자 입력 2016/10/08 14:04

대표로서의 리더쉽, 뚜렸한 명분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불만을로 단식중이였던 이정현대표

[뉴스프리존= 김현태기자]  정당 사상 유례가 없었던 집권여당 대표의 단식농성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을지는 몰라도 당내 상당수 의원들은 이정현 대표의 리더십을 외면하는 모습이다. 단식 일주일 만의 백기투항.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는커녕 만족할 만한 사과도 끌어내지 못한 빈손 회군을 두고 우선 친박계의 비토가 상당한 수준이다. 아군이 등을 돌림으로써 앞으로 이 대표의 서번트 리더십(섬기는 리더십)이 빛을 발할 수 있을지 의문시되고 있다. 비박계의 시선 역시 더욱 싸늘해졌다. 10월 2일 새누리당의 긴급 의원총회가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간 것이 대표적이다. 단식의 전후 상황을 깊숙이 짚어본다. 

과거 단식의 의미를 보여준 전 대통령 김대중은 “노태우 대통령과 민자당이 국민과 야당에 대한 약속을 전혀 지키려 하지 않고 있다. 영구집권 저지와 민주정치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며 내각제 저지와 지방자치제 실시 약속이 없는 한 여야의 협상은 없을 것이다”
 
1990년 10월 8일, 평민당 총재 김대중은 거대여당 민자당에 맞서 내각제 포기와 지자제 실시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국군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정치사찰로 정국이 뒤숭숭하던 시기였다.

 88년 13대 총선은 DJ의 평민당과 YS의 민주당, 그리고 JP의 공화당 등 야3당의 승리를 불러왔다. 집권 민정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힘에 밀려 지자제 실시를 약속했지만 90년 1월 3당 합당을 통해 공룡 몸집의 민자당으로 탄생하며 합의를 번복했고, 이에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DJ는 단식으로 맞선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한, 가장 평화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투쟁이라는 DJ의 단식은 13일간 계속됐다. 단식 4일째인 10월 11일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평민당사를 방문해 김대중 총재를 위로하며 단식 중단을 요청했지만 합의까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15일 평민당 의원들은 의총에서 동조단식을 결의했고 건강이 악화된 DJ는 결국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사이 정국은 강영훈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주석과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하는 등 숨가쁘게 돌아갔다.
 
10월 20일, 여야합의로 요구사항이 타결되면서 DJ는 단식을 풀었다. 내각제는 물 건너갔고 이듬해 기초의회에 이어 95년 전면적인 지방자치제가 실시됐다.
▲ 김영삼(왼쪽) 민자당 대표가 단식 중인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찾아 면담하고 있다.▲ 김대중 평민당총재가 동조 단식을 하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찾아온 신기하(앞줄 왼쪽 두번째) 채영석(세번째) 의원 등으로부터 단식 중단 건의를 받고 눈물짓고 있다.
kimht10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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