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메가박스에 있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약 300명의 관객들로 꽉 찼더군요. 영화가 끝났을 때, 극장 안은 침묵이었습니다."
1월 25일 일요일 아침, <디스 위크(This Week)>에 출연한 공화당 컨설턴트 사라 씨건이 사회자의 질문에 이렇게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개봉 10일째를 맞은 지난 주말까지 약 2억 달러(한화 2000억 원)의 기록적 관객 몰이를 하고 있는 화제의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 얘기다. 이 영화에 대해 많은 이들이 '종료 후 극장 안이 고요했다'는 말로 감상을 대신한다. 내가 겪은 지난 토요일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인들은 이 2시간 14분짜리 '영웅'에 관한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고 느낀 것일까?
[논란①] 아메리칸 스나이퍼, 영웅인가 살인자인가
미국 미시간의 한 고속도로 전광판엔 며칠 전부터 이런 내용의 식당 광고가 등장했다.
"마이클 무어와 세스 로건은 우리 식당 이용을 금지합니다."
일면식도 없을 것 같은 이 두 감독의 공통점은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1월 18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나의 삼촌은 2차 대전 중 저격수에게 사살 당했다. 우리는 등 뒤에서 총 쏘는 저격수가 겁쟁이라는 걸 배웠다…. 저격수는 영웅이 아니다. 침략자의 다른 이름이거나 그보다 더 나쁠 뿐."
영화 <인터뷰>로 인지도가 높아진 세스 로건도 같은 날, 영화를 보면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란 영화의 3막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히틀러가 나치 선전 영상을 보며 눈물 흘리는 이 장면 속에 등장하는 독일군 저격수는 연합군을 사살하며 뛰어난 전과를 올린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지금 미국에서 뜨거운 이슈 중 하나다. 할리우드의 역사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들고 차세대 미국 영화계의 상징인 브래들리 쿠퍼가 주연한 영화,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6개 부문의 수상 후보로 올라 있는 영화다.
전형적인 한 텍사스 남자가 9·11 테러를 목도하고 네이비실(Navy SEAL, 미국 해군의 엘리트 특수부대)이 되어 이라크 전에 참전해 전설적인 저격수가 된다는 이 '영웅담'에 미국이 들썩이고 있다. 배우 알렉 볼드윈, 우피 골드버그도 이 논쟁에 가세했고 가수 키드 락은 마이클 무어에게 네 삼촌은 너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며 두 사람을 보게 되면 '한 방 갈겨 주겠'단다. 전 하원의장 깅리치도 "IS나 보코하람과 함께 몇 주를 지낸다면 마이클 무어가 '아메리칸 스나이퍼'에게 감사할 것"이라며 스나이퍼를 '수호자'라 칭했다. 영화계는 물론 정치·사회적으로 논란이 가열되자 컨트리 가수 블레이트 셸턴은 자신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거라고 했을 정도다.
이들의 논점은 간명하다. 이라크 전에서 공식적으로만 160명(비공식적으론 255명까지)을 저격한 주인공 크리스 카일이 '영웅이냐 살인마냐?'라는 것.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동료를 내 몸처럼 아끼는 남자, 애국심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이 1974년생 평범한 남자가 전쟁터에 자원해 엄청난 숫자의 '적들'을 사살하고 전설이 되는 이야기 속에서 미국인들 자신은 스스로에게 도덕과 상식을 되묻고 있는 듯하다. '이라크 자유 작전'의 민낯을 본 미국인들은 영웅과 살인자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는 듯하다.
정치 풍자를 하는 빌 마허는 토론 프로그램에서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 카일을 '정신병적 애국자'라 했다. 물론 그는 '우리는 카일을 사랑한다'고 마무리했다. "크리스 카일은 영웅이며 미국인을 지켜냈다"는 마이클 무어 고향 식당 주인의 생각처럼, 미국인들은 불편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신념을 믿고 싶은 것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지금 미국에선 하나의 '현상'으로 보입니다. 이건 실화이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일 거예요. 저도 영화를 보면서 그가 영웅인지 살인마인지 내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난 크리스 카일이 조국과 평화를 지킨 영웅이라 믿습니다."
지난 목요일 친구들과 파고 극장에서 영화를 본 대학생 페이스 메이어도 다른 평범한 미국인들처럼 그가 영웅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논란②] 커져만 가는 미국 내 무슬림에 대한 증오
"나는 빌어먹을 야만들을 증오해. 난 그들과 싸우고 있는 거야."
극 중 브래들리 쿠퍼의 대사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추호의 의심 없이 영웅화하는 이들은 영화를 보며 주인공과 함께 공감하며 분노한다. 주인공 카일은 이라크 반군들을 'Savage'라고 부른다. 미개인, 야만인이란 뜻이다. 아직 문명화되지 못한 이들이기에 160명을 죽여도 그의 행동은 이해 받고 그의 살인은 전설이 된다. 고문실 풍경을 비롯해 영화에선 그를 합리화시키는 장면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그때마다 관객에게서 이라크 인들은 타자가 되어 버린다.
할리우드 서부극을 대표하는 배우에서 이젠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전작에서와는 달리 미국 관객들을 안심시키는 몇 가지 안전장치들을 넣어놨다. 밀고자의 어린 아들을 전동 드릴로 숨지게 하는 이라크 반군의 잔인성 그리고 그들 고문실의 끔찍함과 더불어 무기를 감춰 놓고 미군을 속이는 평범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크리스 카일의 상대로는 올림픽에서 조국에 메달까지 안겨준 뛰어난 실력의 '이슬람 스나이퍼'가 있다. 반군이 갖고 있는 차와 무기들이 최신의 미군 전투기와 탱크, 총과 비교할 수 없게 낡고 허술한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이라크 가족이 왜 반군과 미군 사이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지, 미군들이 왜 그 곳에서 싸우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단지 '영웅' 크리스 카일이 그의 동료와 '이라크의 자유'를 위해 폭탄을 든 어린 아이건 코란을 나르는 여성이건 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위의 끔직한 장면들은 합리화 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의 배우 중 한 명인 제임스 우즈도 "미군 저격수가 적들을 향해 총을 쏠 때, 그 적들은 더 이상 우리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가 '사회적 현상'이 되면서 우려는 현실이 됐다. 영화 이후 무슬림에 대한 증오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나에게 몇몇 재수 없는 아랍인들에게 총을 쏘고 싶게 만들었어."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해충 같은 아랍인들의 모습을 잘 표현한 멋진 영화."
"이 영화는 나에게 100배 더 군인에게 감사하게 만들었고 100만배 더 무슬림을 경멸하게 만들었다."
SNS에 올라온 이런 글들이 그것이다. 이런 우려 속에 지난 21일, 미국에 사는 반 이슬람 차별 위원회는 <아메리칸 스나이퍼> 감독과 주연 배우에게 공개편지를 보냈다. 그들은 지난 2010년, 뉴욕 그라운드 제로 부근에 무슬림 문화센터 건립 계획을 발표한 이후 가장 많은 협박과 위협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며 영화로 인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당신들이 목소리를 높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영화 개봉 전, 미군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를 비롯해 다양한 인터뷰와 이벤트를 했던 그들은 아직 이 호소에 대해 어떤 답변도 하고 있지 않은 상태다.
[논란③] 재조명되는 카일 그리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이 영화를 위해 20kg 가까이 몸무게를 늘린 브래들리 쿠퍼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섹시한 배우로 꼽힌다. 카일의 아내로 나온 시에나 밀러와 함께 많은 관객들이 실제 주인공들과의 싱크로율이 완벽에 가깝다고 얘기한다.
2012년 1월 출간된 크리스 카일의 동명 자서전은 최근 서점가에서 새롭게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담당한 작가는 영화의 초고가 나온 후 며칠 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일요일 오후의 반즈 앤 노블, 서점의 가장 좋은 자리에 그의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매대는 수시로 비워지고 채워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인간적인 고뇌와 함께 장례식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와는 달리 책 속의 카일은 자신만만함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 속에 인쇄된 사진 속 동료들은 적군에 의해서 적으로 간주될 사람이기에 이름과 얼굴이 모두 가려져 있었다.
책 내용은 국방부와 미 해군 특수부대에서 모두 검증되었다고 했다. 네 번에 걸린 참전 끝에 전역한 그는 고향 텍사스에 이라크 사막과 같은 환경의 '크래프트 인터내셔널'이라는 사설 사격 훈련장을 설립해 대표로 있었다. 연방 정부와 주 정부 그리고 지역의 소비자들에게 광범위한 (군사) 훈련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영화에서 나왔던 해골을 마크로 쓰는 이 회사의 모토는 '비록 너희 엄마가 뭐라 해도… 폭력은 모든 문제를 푼다'라고 했다.
영화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책 속엔 카일 자신이 쓴 무용담이 있다. 댈러스 남부의 한 주유소에서 두 명의 차량 절도범에게 총을 쏴 사살한 사건과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30여 명의 도둑들에게 총을 쏘아 쫓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의 책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란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후 그가 사망하기 한 달 전 출판된 두 번째 책은 <아메리칸 건>이라는 미국 역사에 기록될 10대 소형화기에 대한 책이다. 이렇듯 어릴 때부터 사냥에 발군의 재능을 보였고 총기에 관심 많았던 그는 결국 동료의 총에 사망했다. 반군들에게 Al-Shaitan(악마)라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카일은 전쟁터가 아닌 미국 땅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었던 전역 군인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그를 살해한 에디 로우스(Eddie Ray Routh)는 이라크 전쟁과 아이티 참상를 겪은 25살의 PTSD 환자였다. 그는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지난 1월, ABC 방송은 미국 전역에 전역 군인 노숙자가 5만여 명에 이른다는 보도를 했다. 그들 대부분은 PTSD를 앓고 있고 부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가족들과 헤어져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하는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미국 거리, 상가, 대학 등지에서 가장 흔히 만나는 부스 중 하나가 군 지원자를 모집하는 곳인데, 학자금 지원 등의 혜택을 선전하며 가난한 젊은이들을 모집한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몇 년의 복무가 인생의 탈출구가 되기는 여러모로 어려운 것임을 실감한다. 버스나 신문 등에서 흔히 보는 광고 역시, 제대 군인들의 정신과 상담에 관한 내용이니 말이다.
그래서 미국은 승리했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미국인이 아닌 이의 눈으로 보기엔 개인적으로 너무 힘든 영화였다. 이라크인들을 절대 악으로 설정하고 브래들리 쿠퍼의 총이 백발백중 '나쁜 놈'을 쏴 맞춰주기만을 바라기에는 그들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미 공군의 공중전 폭격에 관한 기록 <폭격> 속의 한반도처럼 이라크 땅 건물들은 이미 폐허가 됐고 무너져 있었다. 그 속에서 모질게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있는 이들에게 미군이 어떤 존재일지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크리스 카일이 자신의 아들을 안고 행복해 하고 있을 때, 무슬림 스나이퍼 무스타파는 과거의 영광과 아내, 어린 아기를 뒤로 하고 총을 들고 나갔다. 비슷한 또래의 비슷한 젊은이들이 역시 비슷한 애국심 어린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하나는 악마고 하나는 영웅이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은 승리했나? 지금도 어느 전장에서 어린 병사가 오들오들 떨고 있지 않을까? 무스타파의 어린 아들은 어떻게 자라게 될까?
마지막으로 마이클 무어가 그의 관점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던진 독설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당신이 저 멀리 7천 마일에서 온 침입자에 맞서기 위해 당신 집 지붕 위에 있었다면 당신은 저격수가 아니라 용감한 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