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현실' 사이]
-새로운 가족관계도 걸림돌
"재산 욕심 때문이 아냐… '족보' 복잡해지는 게 싫어"
-자식 눈치에도 재혼 늘어
"20년 넘게 독수공방할 텐데 자식들도 현실 받아들여야"
고모(69)씨는 지난해 말 가족 모임에서 큰아들 부부에게 힘들게 말을 꺼냈다. "김 선생님이라고…. 인품도 좋고, 집안도 넉넉하신 분이 있어. 내가 그분만 만나면 맘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 아들이 답했다. "아, 그러세요? 어머니가 좋으시면 저희도 좋죠. 언제든 편하게 만나세요." 아들의 이야기는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요, 두 분이 결혼은 하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고씨는 편하게 만나라는 말보다 결혼은 하지 말라는 말이 더 크게 들렸다고 했다. 고씨는 내심 '김 선생님'과 결혼을 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여자인 딸은 어느 정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딸은 더 단호했다. "자식들이 용돈 다 챙겨주지, 몸도 건강하지… 엄마가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예요? 연세 생각 좀 하세요. 김 선생님이란 분 여든 가까이 되셨다면서, 그분 병시중하다 남은 인생을 보내려고 그러세요?" 고씨는 다시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고씨는 "우리가 젊었을 때는 부모 눈치를 보고 결혼을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자식 눈치가 보인다"고 말했다.
몸과 정신이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진 신(新)중년들은 홀로된 후의 재혼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60세가 넘은 나이에 연애가 재혼까지 이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렵사리 재혼을 한다고 해도 얼마나 건강하게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주변의 시선도 신경쓰이고, 자식의 눈치도 봐야 한다. 물려줄 재산까지 남아 있다면 상속 문제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복잡해지는 상속 셈법… "어머니, 재혼하지 마시죠"재혼에 대한 신중년들의 사고방식은 개방적이다. 본지가 '선우' 결혼문화연구소에 의뢰해 신중년 300명에 한 설문에 따르면 사별·이혼 후 다른 이성을 사귀는 것에 대해 49%가 찬성했고, 재혼에 대해서도 40%가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반대는 각각 28%, 36%였다.
60대 이후 재혼을 하게 될 경우 장애 요인을 물었더니 '자녀의 의견'이 43%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본인의 건강'(26%)과 '재산 및 상속 문제'(25%)가 뒤를 이었다. 상속도 자녀와 관련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10명 중 7명이 재혼에 앞서 자식 걱정을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재혼이 어려워졌을 경우에 결혼을 강행하겠다는 신중년은 거의 없었다. 49%는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했고, 47%는 애인으로 만나는 것에 만족하겠다고 답했다. '그래도 결혼하겠다'는 답은 남녀 각각 8%, 2%에 그쳤다.
자식들의 반대 비율도 높은 편이다. 결혼정보업체 '듀오'가 20~30대 미혼 남녀 427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8월 조사한 결과 10명 중 6명이 '부모의 재혼에는 반대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홀로된 부모가 실제로 재혼하겠다고 나서서 재혼이 현실적인 문제가 되면 반대 비율이 최소 10%포인트 이상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자식들이 홀로된 신중년의 재혼을 반대하는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는 재산 문제다. 듀오 설문에서 자녀들은 재혼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로 '재산 상속 문제로 불화가 생길 것 같아서'(32%)를 꼽았다. 2위는 새로운 가족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31%), 3위는 주위의 부정적 시선(19%), 4위는 전(前) 배우자에 대한 도리(15%) 등이었다. 회사원 박모(여·41)씨는 "드러내 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몇 년 함께 살고 재산을 뚝 떼가는 것 아닌가. 자식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부모의 재혼을 찬성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새로운 가족 관계도 문제다. 사별 후 홀로된 어머니(68)를 둔 신모(45)씨는 어머니가 만나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재혼은 '절대 반대'다. 물려받을 재산이 거의 없어 상속 욕심 때문은 아니다. 신씨는 "새로운 아버지가 오면 성(姓)이 다른 그쪽 자식과 형님·동생 하며 가족처럼 지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하고 살아야 할지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한마디로 '족보'가 복잡해지는 게 싫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독수공방 쉽지 않아, 자식들이 수용해야"자녀의 반대에 대한 홀로된 부모들의 '눈치 보기'에도 불구하고 신중년의 재혼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미혼 남녀 회원만 상대하던 결혼정보업체들도 50~60대 회원에 문을 열고 있다. 결혼정보업체 선우의 경우 50~60대 회원이 최근 3년간 200% 이상 증가했다. 다른 업체들도 60대 이상 회원 수가 빠르게 느는 등 신중년의 재혼이 비즈니스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중년의 재혼이 늘어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도 한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2013년 기준으로 60세에 홀로되면 남성의 경우 22년, 여성은 27년을 홀로 살아야 한다. 2030년이 되면 이 기간은 남성 24년, 여성 29년으로 늘어난다. 이호선 한국노인상담센터장은 "평균 수명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60대 이후 홀로됐다고 해서 20년 넘는 세월을 독수공방으로 살기는 어렵고, 자녀가 부모에게 혼자 지내시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며 "결국 신중년층의 재혼은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이고, 자식들도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