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졸지에 ‘샤머니즘의 나라’가 됐다. 무엇보다 외신에 비친 모습이라 충격적이다. 외신은 ‘국정농단’ ‘비선실세’의 장본인 최순실(60)과 그녀의 아버지 최태민(1912∼1994)을 ‘21세기 한국형 라스푸틴의 재림’에 빗댔다. 호사가들은 한국 역사에서 권력자를 농락했던 고려 공민왕 시대 요승(妖僧) 신돈, 조선 고종 시대의 무당 ‘진령군(眞靈君)’에 비유하기도 했다. ‘빙의’ ‘오방낭’ 등 무속적 용어는 이번 사태 내내 안주거리처럼 오르내렸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헌정 사상 최초로 검찰 수사를 받을 처지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심리분석까지 회자된다. 이런 심리분석은 희대의 살인마 같은 도저히 이해 불가한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에 하는 일이다. 최고 권력자 스스로 그런 처지를 자초했다.
한국형 라스푸틴의 재림?… 최태민은 무당 증언도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3일(현지시간) ‘한국 대통령 스캔들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란 기사를 통해 2007년 7월 주한 미국대사관이 미 정부에 보낸 외교 전문 등을 언급하며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WP는 “최태민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몸과 영혼을 통제하는 부적절한 관계라는 주장이 있다”며 최태민을 ‘한국의 라스푸틴’으로 묘사했다. 앞서 뉴욕타임스도 같은 요지의 기사를 썼다.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1869∼1916)은 제정 러시아 말기에 활동한 심령술사다. 떠돌이 농민 출신이었던 그는 자신을 성자라 부르는 독특한 종교관을 설파해 당대 유명인사가 됐다. 종교적 신비주의를 좇던 상류층에게 주목받은 뒤 황제 니콜라이 2세 부부의 신임까지 얻었다. 혈우병에 걸린 황태자를 치료해준 것이 신임을 얻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황제의 배후에서 내정간섭을 일삼다 암살당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정을 농단한 비선실세들은 하나같이 권력자가 고독과 불안, 공포감에 빠져 판단력을 상실했을 때 접근했다. 주술과 신비주의를 내세워 권력자를 홀리고 장막에서 권력을 휘두른 것도 비슷하다. 요승 신돈도 공민왕이 아내 노국공주를 잃고 극도의 실의에 빠졌던 상황에서 절대 신임을 얻었다. 조선 고종 때 ‘진령군’도 명성황후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찾아갔다.
진령군은 무녀 박창렬이다. 일개 무녀였던 그가 위세를 떨치게 된 경위는 이렇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분노한 군인들은 자신을 차별한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해 경복궁에 쳐들어갔다. 이때 명성황후는 상궁으로 위장하고 장호원으로 도망갔다. 얼마 후 명성황후에게 한 무녀가 찾아왔다. 그는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중전(명성황후)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며 궁에 돌아갈 수 있는 날짜를 언급했다. ‘환궁 예언’이 적중하자 명성황후는 그를 궁으로 데려갔고, 마침내 왕자 급의 고위 작위인 ‘진령군’으로 봉했다. 그가 조정의 숨은 실세로 활약하자 출세를 노리는 관리들은 진령군에 접근하며 남매를 맺기도 하는 등 촌극을 빚기도 했다. 갑오개혁과 함께 투옥되며 그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사이비 교주 최태민이 파고든 것도 22세에 어머니를 총격에 잃었던 영애 시절의 박근혜였다. 심리연구소 ‘함께’ 김태형 소장은 최근 한 라디오방송에서 “어머니를 잃은 뒤 두려움과 고독감이 컸을 상황인데, 이를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 희대의 사기꾼 최태민”이라고 말했다. 한때 최태민의 측근이었던 전기영 목사는 지난달 27일 국민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최태민은 주술가이고 무당”이라며 “차라리 이번 일이 잘 터진 것 같다. 청와대에서 주술의 힘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의존성 인격장애 vs 반사회적 인격장애
그런데 최태민에 이어 딸 최순실까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박 대통령의 심리는 무엇인가. ‘심리조작의 비밀’(어크로스 발행)의 저자인 일본 심리학자 오카다 다카시가 말한 ‘의존성 인격장애’에서 답을 찾는 이도 있다. 통상 주변에는 ‘프레너미’(친구 같은 적)가 넘쳐나기 마련인데, ‘병이나 이별, 경제적 곤경으로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쉽게 희생양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존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자신은 살아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을 의존하는 사람에게 맡겨버린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표 시절 “중대한 결정을 못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고 전여옥 전 의원은 증언했다. 대통령이 돼서도 그랬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정무수석으로 있던 11개월 동안 독대한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공조직 대신 최순실과 그의 사람들에게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인 이나미씨는 4일 “의존성 인격장애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이코패스에 가깝다”면서 “‘짐은 국가’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배워 사회와 공감능력이 거의 없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최순실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 본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권력층에서 많이 나타난다”며 권력 상층부의 부패구조를 지적하기도 했다.
도처에 잠복한 ‘제2의 최순실’
막장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막장 정치 현실이 오락거리처럼 소비되면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사회운동가 박권일씨는 “최순실 게이트가 최씨와 그의 패거리들의 국정농단 과정에서 보여준 천박성에 맞춰지면서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면서 “본질은 국민이 선거 절차를 통해 위임한 권력을 사유화한 것이다. 중고생까지 촛불시위로 나가는 국민들의 분노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제2의 최순실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기획재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사조직의 권력 농단이 있을 때 청와대는 물론 정부 고위관료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는 개인이 돌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헌법을 고쳐서라도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개조가 일어날 수 있는 시스템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순실 너머를 보지 못하면 역사는 반복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의 전근대성, 비합리성의 또 다른 이름인 제2의 최순실의 유령은 정치권과 관가뿐 아니라 민간에도 떠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