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1907년 문열어 영화 메카로
ㆍ2008년 부도 후 세번째 경매도 유찰
ㆍ권리관계 복잡 ‘앞날 안갯속’
[연합통신넷= 안호기 선임기자·이혜인 ] 국내 최초 영화관 단성사가 세 번째 입찰에서도 주인을 찾지 못했다. 단성사는 1907년 문을 연 뒤 한국 근현대 영화의 대표공간으로 자리 잡아 왔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영화산업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쇠락했고, 2008년 끝내 부도를 내 영화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부동산 경매전문업체 지지옥션은 서울중앙지법에서 지난 5일 열린 서울 종로구 묘동 단성사 빌딩에 대한 3회차 경매가 입찰자가 전혀 없어 유찰됐다고 6일 밝혔다.
단성사 빌딩은 지난해 6월26일 감정가 962억6920만원에 1회차 경매가 유찰된 이후 세 번째 경매에 나왔다가 모두 유찰됐다. 오는 3월12일쯤 열릴 4회차 경매의 최저 입찰가격은 감정가의 51%인 492억8983만원이다. 경매 대상은 묘동 인근 토지 4개 필지 2009.1㎡(감정가 741억여원)와 건물 1만3642㎡(지하 4층~지상 10층)이다. 유찰 이유는 건물의 권리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먼저 공사 대금 및 리모델링 대금으로 43억원의 유치권 신고가 있다. 우리이에이제17차유동화 전문 유한회사는 10억원을 받지 못했다며 2012년 8월 경매를 신청했다. 여러 저축은행과 개인도 경매 배당금을 받겠다며 신고하는 등 관계인이 500명을 웃돈다.
이창동 지지옥션 연구원은 “단성사 빌딩은 권리 관계가 복잡한 데다 추가 인테리어 공사가 필요해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면서 “극장 용도를 업무 및 상업시설로 바꿔야 하고, 사무실 분양도 해야 하는 등 절차가 까다로운 만큼 입찰에 참여하는 사람이 적다”고 말했다.
단성사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대중문화의 터전이었다. 1907년 2층 목조 건물로 세워진 단성사는 1910년 일본인에게 넘어갔으나 다시 1910년 중반에 한국인이 인수해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1919년 10월 한국인에 의해 제작된 연쇄활동사진극 <의리적 구토>, 1924년 초 단성사 촬영부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이 개봉됐고 한국 영화사에 획을 그은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과 첫 발성영화 <춘향전>(1935년)도 이곳에서 상영됐다. <역마차> <애수> <대부> 등 해외 걸작도 단성사에서 관객을 끌어모았다.
한국 영화의 흥행기록을 이어갔던 <겨울여자>(1977년), <장군의 아들>(1990년), <서편제>(1993년) 등은 모두 단성사에서 단독 개봉한 영화다.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 상영 당시에는 밀려드는 관객으로 단성사 현관문이 부서졌고, 영화를 보려는 관객이 종로2가까지 길게 늘어서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단성사의 흥행 성적이 전국 흥행의 바로미터가 될 정도로 단성사가 한국 영화계에 주는 무게감은 컸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바람이 불면서 단성사 입지는 급격히 좁아졌다. 2001년 옛 건물을 헐어내고 신축 공사를 거쳐 2005년 2월 총 7개관 1530석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단장해 관객을 맞았다. 재개관 이후에도 단성사를 찾는 관객은 급격히 줄었다. 경영난으로 수차례 주인이 바뀌는 수난 끝에 결국 단성사는 재개관 3년여 만인 2008년 부도를 냈고, 이듬해 아산엠단성사를 새 주인으로 맞았다.
아산엠 측은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의 ‘귀금속산업 뉴타운의 종합지원시설’ 유치 계획에 따라 영화관을 줄여 보석전문상가로 바꾸는 계획을 세우고 대규모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 침체로 분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서울시 계획마저 무산되자 2012년 공사가 중단돼 현재까지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