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민(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원)
지금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국민의 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 사실은 대통령이 아니었고 제3의 인물이 사실상 대통령이었다는 데 대해 전 국민이 정신적 공황을 느끼고 있다.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보수 세력의 ‘30% 벽’도 무너졌고, 대통령 지지율은 5%로 헌정사상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대부분의 언론과 전문가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을 질책하고 있고, 사실상 행정부는 마비됐다.
그런데 지난 10월 27일, 정부는 국민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었던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약(GSOMIA: 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을 다시금 꺼내들었다. 북한의 급증하는 위협에 대한 대비책으로 일본과의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협약의 내용은 지난 2012년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은 THAAD 배치 등으로 굳건해진 한-미-일 공조 체제를 더욱 견고히 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4년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북한의 핵무장은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준이 되었고, THAAD 배치 문제로 중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일본과는 위안부 졸속 합의를 비롯해 아베 정부의 우경화와 보통국가 추진으로 적대 관계가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논의도 없는 정부 단독의 강경 추진은 이해할 수 없다. 더군다나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비상시국인 이때에 외교 정세를 결정지을 수 있는 사건을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용인되기 어렵다.
# 현 정부가 손대서는 안 되는 문제: 외교와 안보
현 정부는 역사상 최저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2~30대 지지율은 1%가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호남에서는 놀랍게도 0%라는 전대미문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지지율 폭락의 원인을 제공한 사건들이 제대로 수사되지 않았고, 대통령 스스로 특검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수십만 시민들이 전국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런데 중차대한 ‘안보’ 문제를 언급했다. THAAD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THAAD 배치 논의가 불거지고 동북아 정세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이에 더해 이번 협약은 한-일 간 직접 군사동맹으로 이어질 여지를 많이 담고 있다. 사안에 따라 국가의 2급 비밀까지 상호 공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협약이 성사되면 동북아 문제는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다. 동북아 정세가 한-미-일 vs 북-중-러 구도로 고착화되고, 신(新)냉전이 초래될지도 모른다.
# 왜 문제인가: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의 쟁점
이 사안이 최초로 언급되었던 2012년 당시에도 남한의 강력한 대북 억제 정책 때문에 긴장은 고조되었다. 북한의 위협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강한 공조는 이명박 정부에게 이 협정이 필요하다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4년의 세월을 거쳐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은 과연 찬성할 만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4년 전과 같이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이 협정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각각 살펴보자.
1. 장점
1) 일본의 우월한 정보 자산 활용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 자산을 가지고 있다. 군사위성(4기)을 포함하여 적의 잠수함 세력을 조기에 포착-추적-격침할 수 있는 대잠 항공 세력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의 잠수함 세력에게 당한 경험으로 일본은 대잠 전력에 대한 하드웨어적 구비는 물론이고 소프트웨어적으로도 충실하다. 따라서 일본과의 정보 협력은 군사위성을 이용해 적 세력의 동향을 조기에 파악하고, 압도적으로 우월한 항공 전력을 활용할 수 있어서 북의 잠수함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 한-미-일 연합 공조 체계 강화
또 다른 장점으로는 한-미-일 연합 공조 체계의 강화를 들 수 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대해 각각 군사동맹을 맺고 있지만 정작 한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번 군사협정은 한-일간 군사 직접 동맹을 위한 교두보가 될 수 있다. 일본이 자위대를 파견 가능토록 하는 ‘집단자위권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한반도 유사시 직접적인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는 급증하는 북한의 위협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군사적 위협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게 된다. 현재의 동북아 균형을 보았을 때 한-미-일 3국의 직접 군사동맹은 현 체제를 유지하고자 할 때 큰 힘이 된다.
2. 단점
1) 정보의 비대칭성
북의 동향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정찰 자산을 활용한 정보(information)의 수집과 획득한 정보를 가공할 수 있는 능력, 첩보(intelligence)가 모두 중요하다. 일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이 정찰 세력을 활용한 정보로 사실상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는 정보와 큰 차이가 없다. 또한 일본이 정보 자산을 다수 확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런 자산들을 활용하여 얼마나 의미 있는 정보를 획득할 수 있을지, 또 정보를 분석하여 첩보로 가공하는 능력에 대해선 신뢰하기가 어렵다.
일본에 비해 우리는 망명한 북한의 고위 간부 등의 탈북자와 DMZ 근처의 방첩 활동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정보 기대치가 높다. 또한 탈북자들로부터 획득한 정보의 진위 여부와 외부에서 확인하기 힘든 첩보 역량 등에서 일본과 차이가 나다. 따라서 협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일본이 더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2) 국민 정서 문제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부터 시작해서 끊이지 않고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2010년 간나오토 담화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이후 계속해서 이어진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를 통해 진실성을 의심받았고, 최근의 아베 정권은 여태의 사과를 뒤집고 식민 지배의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 또 위안부 문제를 서둘러 매듭지으려고 하는 모습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보통국가를 시도하는 일본의 모습은 우리 국민에게 큰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GSOMIA는 우리가 보유중인 비밀 정보 중에서 Ⅱ급 비밀까지 서로 공유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의 작전 개념은 대부분 북한과 관련된 것이 많아 자칫 잘못하면 작전 정보가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어 안보상의 큰 불이익이 발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3) 동아시아 긴장 급증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미 동북아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 능력과 타격 능력의 급속한 고도화로 인해 긴장의 수준이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이런 북에 대응하기 위한 THAAD 배치 등의 문제로 인해 한국과 중국간의 관계 역시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
2014년, 이미 중국은 한-미-일 정보 공유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아시아 NATO’의 결성과 그것의 목적이 중국 압박에 있기 때문이다. GSOMIA로 인해 각국의 정보 공유가 깊어지고 작전 개념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면 자연스레 동맹의 연결고리는 강해진다. 여기서 삼국동맹의 가장 큰 축인 미국의 의도가 반영되면 중국에 대한 작전 개념이나 훈련 등이 실시될 수 있다. 서해에서 한-미-일 삼국의 연합 함대가 훈련을 하거나 우리의 방공구역에서 삼국의 전투기가 훈련을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중국은 현행 한미연합훈련에 대해서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는데, 여기에 일본까지 가해진다면 THAAD 문제와 함께 대중관계는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 또한 ‘아시아 NATO’의 결성은 필연적으로 이에 대항하는 세력인 북-중-러 삼국동맹의 결성을 예고한다. 다시 한 번 동북아에 냉전 수준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불안에 떠는 삶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얻을 이득에 비해 잃을 것의 중대함이 더 크다. 국제 관계에서 한국의 위치는 더욱 협소해질 것이다. 장점에서 언급했던 요소들조차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그나마 일본의 대잠전 능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한 장점인데, 이를 위해서는 결국 한국과 일본의 직접 군사동맹 체결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의 보통국가화, 자위대의 국방군으로의 승격을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먼저 승인해주는 셈이다.
이번 GSOMIA의 시기적 상황과 조건은 2012년보다 훨씬 나쁘다. 2012년에는 청와대가 주도하고 국방부와 외교부는 그저 따라가는 식이었다. 이번에도 그 점에서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한번 실패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국민적 합의나 전문가들의 논의도 없이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저 대통령이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민의 정서와 세계적 정세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잘못된 선택이다.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추진 시점이다. 이런 비상시국에 국민적 반대로 무산되었던 협정을 부활시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보수의 으뜸패가 ‘외교’와 ‘안보’라고?
안보는 보수의 집권 전략에서 늘 상위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전후세대는 북한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보수 세력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북한은 우리의 적으로 교육되었다.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전후세대에게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진보 세력의 정책과 정략은 인정될 수 없었다. 당장 내 가족과 친지가 죽임을 당했는데, 그들과 화친을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시시때때로 무력도발을 일삼는 북한은 보수에게 좋은 도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보수는 안보를 정말로 잘 했을까? 보수가 집권하는 동안 우리의 안보는 언제나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형태를 유지해왔다. 마치 그것만이 답인 것처럼, 생존이 제1목표가 되어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정책을 펴왔다. 그것이 진보 정권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잘 먹혀들어 갔다. 그러나 진보 정권 10년이 보수 세력의 안보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증명했고, 평화와 화해만이 진짜 ‘안보’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이 다시 집권한 지 9년여 간, 우리나라를 둘러싼 안보 환경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좋아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명박 정부 때 ‘사자방’으로 불리는 헌정사상 가장 거대한 비리를 통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신뢰를 잃었다. 뒤를 이은 박근혜 대통령은 휘황찬란한 옷으로 몸을 둘러싸고 전 세계를 누비고 있지만 정작 실효는 하나도 없었다. 이래놓고 보수가 계속 외교와 안보를 잘 책임진다고 이야기하는 현실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 튼튼한 안보는 복지국가의 첫 걸음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건 안보는 제1의 목표이다. 전쟁과 생존의 불안은 모든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이런 상황에서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모든 복지 노력은 시작되기 어렵다. 생존이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수 정권은 이런 안보를 담보로 막대한 정치적 이득을 챙겨왔다. 그리고 계속된 집권을 위해 안보 이슈로 국민들의 눈을 돌리고, 보편주의 복지국가 주장은 북한과 결부시켜 정치적 선택지에서 배제시켜 왔다. 우리나라에서 복지가 논의되기 힘든 배경의 형성에 보수 정권이 상당 부분 기여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현 보수 정부는 신뢰를 잃었고 마비되고 말았다. 더 이상 국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보수가 말하는 ‘가짜’ 안보와 정치 논리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기 힘들다. 낮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출산율, 그리고 높은 빈곤율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국민은 ‘새로운 길’의 등장을 기다린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은 민주주의 가치를 기반으로 보통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역동적 복지국가여야 한다. 그런 복지국가를 위한 논의를 지금부터 시작하자. 평화와 화해를 통해 ‘진짜’ 안보를 만들 수 있는 그런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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