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안데레사기자]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advice 청와대는 숨어야. 검증 시에도 특정 직책은 no comment(노코멘트)’라고 적혀 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해 청와대는 ‘대통령의 동선은 기밀’이라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런 기조의 배경에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세월호 참사 석 달째인 2014년 7월 17일에 적힌 이 문구 옆에는 김 전 비서실장을 뜻하는 ‘長’이 표시돼 있다. ‘답변서 작성’이란 글 옆에는 ‘기침 취침 집무, 경내 계신 곳이 집무 장소, 경호상 알지도 알려고도 않는다, 자료 제출 不可(불가)’ 등이 있다. 이는 청와대의 공식 답변서에도 그대로 등장하는 문구다. 김 전 실장이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해 해명하라는 사회 각계 요구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윤회 문건 유출’ 파동으로 불거진 ‘비선 실세’ 논란에 대한 입장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2월 13일 기록을 보면 김 전 실장은 문건 유출 사건에 대해 조기 종결을 지시했다. 수첩에는 ‘과거에는 모두 이권개입, 부정부패 사례였음. 부정부패와는 무관. 안보 관련 비밀 유출 사례도 아님. 황색지의 작태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임. 온 나라가 들끓을 사안이 아님’이라고 쓰여 있다. 이에 따라 김 전 실장과 청와대가 본질은 놔두고 사태 진화에만 매달리다 정작 비선 실세의 몸통에 대해 제대로 수사할 기회를 놓쳤고 ‘최순실 사태’까지 이르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권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민생’ 타령을 하던 청와대가 정작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국민의 삶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대신 ‘대통령의 7시간’ 등 VIP(대통령)의 안위에만 신경을 썼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2일 기자회견을 열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비망록 중 ‘청와대의 언론 통제·문화 검열 주요 내용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김 전 민정수석이 재직한 2014년 6월부터 2015년 1월까지 160쪽 분량의 비망록에선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발언은 長으로 표시하며 날짜별로 지시사항을 기록했다.
비망록에선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윤회씨와 함께 있었다’는 소문을 칼럼으로 쓴 데 대한 대응이 많이 담겼다. 2014년 8월3일 칼럼 게재 직후인 7일 메모에선 “長 산케이 잊으면 안된다 - 응징해줘야 List 만들어 보고, 추적하여 처단토록 정보수집 경찰 국정원을 팀구성토록”이라는 과격한 방침이 나온다. 9일과 10일에는 “국가원수의 경호안전상 대통령의 동선을 공개할 수 없음” “대통령 계셨고, 볼 일도 없고 만난 일도 없다”는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 문제 제기마다 나온 청와대의 대응 지침이 메모로 실렸다. 또한 10월6일에는 “산케이 처리 후 후속대비” “이슈화 예상, 위안부 문제 고지 선점, 일 정부 반전 기도 예상”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가토 지국장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기소가 외교 문제로 비화돼 ‘위안부’ 문제 해결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행했던 셈이다.
8월11일 “명예훼손 사범 엄단”이라는 메모는 정부의 검열 강화 신호탄으로 여겨진다. 8월26일에는 “長 VIP 모독 장하나 의원 - 중앙지검고발(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9월26일에는 “수원시 백정선 의원 VIP 모욕 件 - 응징 방법 강구”라고 되어있다. 대통령을 ‘모욕’한 사람에 대해 보수시민단체를 동원해 고발한 것이다. 11월1일에는 박 대통령 풍자 전단을 살포한 팝아티스트 이하(이병하)씨에 대한 처리 방안이 나오고, 3일에는 “대통령모욕전단살포행위 ①건조물 침입 ②경범죄법 → 경범법 법정형 상향 개정”이라고 되어있다. 대통령 모욕으로 처벌할 수 없자, 법 개정까지 나선 것이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은 “결국 2015년 3월 경찰에서 전단지 살포 처벌 조항이 없자, 관련 매뉴얼을 하달해 논란이 됐다”면서 “지난해 12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인터넷상 명예훼손에 대해 제3자가 신청해도 삭제할 수 있도록 한 심의규정 개정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윤회 문건 보도에 대해선 탄압에 나섰다. 11월26일에는 “적에 대하여는 적개심을 가져야” “세계일보 세무조사 중(?)”이라는 메모가 있다. 실제로 정윤회 문건이 공개되고 통일교 재단 기업이 세무조사를 받았다. 이후에도 종편과 조선·중앙일보 등 보수언론의 취재 동향에 관심을 쏟으면서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챙겼다. 세계일보에 대해선 ’황색지’라고 적었으며, ‘압수수색’ 언급까지 있다. 이 와중에도 “長 대통령 충성·사랑은 「자기희생」으로 표현해야. 불만, 토로, 누설은 쓰레기 같은 짓”이라며 내부자 단속에 나섰다. 관련 메모는 2015년 1월2일 “세계일보 사장 교체 움직임”이 마지막이다.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정윤회 파동 당시 최순실 라인의 압박으로 사장 교체가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비망록에선 박근혜 대통령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실장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로 묘사한 ‘세월오월’을 그린 홍성담 화백과 광주비엔날레 전시 취소 논란 당시 대응 방침도 적혀있다. 9월1일 메모에선 “홍성담, NYT 인터뷰 - 최상언 - 경향”이라고 되어있다. 당시 홍성담 작가의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소개한 경향신문 기사까지 문제 삼은 셈이다.
부산국제영화제 <다이빙벨> 상영 논란에 대해선 2014년 9월5일 “교문위 국감장에서 성토 당부(신성범간사)”라는 메모가 있다. 실제 그해 10월 국감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관련 질의를 하며 <다이빙벨> 상영을 문제삼았다. 비망록에는 대관료 등 자금원 추적 등의 압박 내용도 담겼다. 문화예술계에 대해선 “좌파 책동 대응 지시”를 하고, 영화 <국제시장>은 “보수, 애국”이라는 평가와 함께 지원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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