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안데레사기자] 오늘 3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6차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낮 시간부터 자발적으로 모여진 사람들은 과격한 문구나 과격한 동작이 사라진지가 오래다. 외국 사람도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하며 즐겁게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성숙한 시위 문화가 정착하게 된 동기의 시작은 어찌 되나 궁금하였다.
촛불집회의 문화 시작
촛불집회의 시작은 2002년 11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평범한 학원 강사, 김기보(당시 30세)씨가 한 언론사 게시판에서 올린 글이 발단이 됐다.
그는 “광화문에서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천 수만의 반딧불이 됩시다”라며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걸읍시다. 6월의 그 기쁨 속에서 잊혀졌던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합시다”라고 촛불집회를 제안했다. 이 글은 인터넷을 타고 일파만파 확산됐다.
그리고 약속한 11월 30일이 되자 거짓말처럼 무려 1만명의 인파가 광화문 사거리에 운집했다. 주최측이 없다보니 한쪽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다른쪽에서는 자유발언이 진행되기도 했다. 최초 제안자인 김기보씨도 화단에 올라서 집회 참가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날의 시위는 특정 집단이 주도한 기존 방식과 달리 온라인 네트워크를 활용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라는 측면에서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후 촛불집회 참가자는 일주일 뒤인 12월 7일 5만명, 12월 14일 10만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하지만 김기보씨는 촛불집회의 방향성과 순수성과 관련해 논란의 중심에 서게된다. 처음에는 추모 성격이었던 촛불집회가 점차 자발성을 잃고 반미 집회 양상으로 번져가면서 경찰과의 충돌도 벌어졌다. 결국 김씨는 “범국민 대책위원회와 별도로 평화와 반전을 주제로 촛불집회를 열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1987년 6월 학생들은 전두환 대통령의 4월 13일에 발표한 내용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섰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시민들도 동참했다. 함께 하지 못한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반대로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학생과 시민들을 강제 해산 시켰다. 이런 모습들이 90년대까지 이어진 시위문화였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백골단(시위자체포전단반)을 해체한데 이어 최루탄 사용을 금지했다. 경찰은 최루탄 사용대신 진압봉과 방패를 사용했다.
2002년 여중생 사망사건 때 한 네티즌에 의해 시작된 촛불시위는 시위문화를 바꾸어 놓았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반해 경찰은 강제해산을 명목으로 진압봉과 방패를 사용했다.
지난달 초부터 청계광장에서 몇몇 시민이 모여 작게 시작한 촛불집회는 불과 한 달 만에 대규모 집회로 커졌고, 경찰로 규모 확산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했고, 물대포까지 동원해 시위자들을 해산시켰다. 촛불시위 참가자들도 경찰차 방어벽을 끌어내는 등 물리적 행동을 벌였다. 하지만 모두가 염려했던 ‘610 100만 촛불대행진’은 시위참가자와 경찰의 물리적 충돌이 없는 대신 많은 새로운 문화코드가 만들어졌다. 촛불집회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서울광장에 모여 축제처럼 시위를 즐겼고, ‘넥타이 부대’와 ‘예비군 부대’ 등 탄생했다.
촛불시위자에 물대포에 경찰특공대까지 투입
이번 촛불시위는 시대변화에 따라 많은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촛불시위에 참가하면서 노트북과 휴대용 인터넷을 이용 현장생중계를 했다. 또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해 현장 분위기를 알리기도 했다. 온라인세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행동한 이들 세대는 현장정보를 알리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힘에 의해 동영상 전문 싸이트 아프리카(www.afreeca.com)는 촛불문화제 방송 누적 시청자수 400만명, 판도라와 유투브 등 관련 동영상 2천건이 올라와있다.
이번 촛불시위 현장생중계로 ‘아프리카’는 유명 싸이트가 됐고, 인터넷신문들도 합세해 현장생중계의 붐을 이루었다. 또한 이들 인터넷신문은 현장에서 전문 패널과 함께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즉석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소형 디지털카메라와 핸드폰카메라가 힘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경찰과의 대치상황이나 몸싸움 현장에서는 어김없이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동영상 촬영도 이뤄져 강경진압한 경찰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특히 전경 군홧발에 머리를 짓밟히는 여학생의 동영상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는 핸드폰카메라 동영상이 봇물을 이루었다.
‘스트리트 저널리즘’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이번 거리기자들은 경찰의 강경진압에 감시자 역할을 하면서 시위현장의 새로운 정보소통의 중심이 되고 있다.
하지만 현장내용을 표현하면서 자극적이거나 감성적으로 흐르는 경향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나선 거리기자들은 방송카메라들이 찾지 못하는 현장 구석구석을 찾아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거리기자의 현장중계는 새로운 시위문화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등장한 ‘넥타이 부대’, 새롭게 등장한 ‘예비군 부대’
87년 6월. 명동일대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위에 참가한 주변 직장인들을 ‘넥타이 부대’라고 불렀다. 21년이 지난 2008년 6월. 퇴근하고 양복차림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직장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문자메세지나 온라인 동호회 등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하자고 해 나왔다고 말했다.
집회 현장에는 시위대와 구경하는 시민들이 있었는데 이번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자발적인 참여 때문에 그 경계가 사라졌다. 또한 여고생들의 새로운 우상으로 탄생한 ‘예비군 부대’의 등장이다.
지난달 29일 촛불집회에 처음 등장한 ‘예비군 부대’는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촛불집회에 참여했으나 한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예비군들이 동참해 폭력시위를 막자`는 글을 보고 모여들었다.
이들은 시위대 앞에 서서 인간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과 시위대 충돌의 완충 역할을 했고, 경찰의 강제 연행을 막으며 시민보호를 했다. 이러한 ‘예비군 부대’에 대해 시민들은 `국민오빠`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군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초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군의 명예와 자긍심을 훼손시키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보수단체들이 열고 있는 국민대회 등에서 퇴역 장군들이 군복을 입고 시위를 벌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어 ‘이중잣대’라는 논란이 되고 있다.
하루만에 철거하는 컨테이너 방어선 예산낭비 지적도
‘100만 촛불대행진’과 관련, 전국 경찰병력 100% 동원하게 되는 갑호 비상령을 내린 가운데 어청수 경찰청장의 명령으로 광화문 네거리에 컨테이너를 쌓았다.
시위대의 청와대 진출을 막기 위해 4t의 컨테이너 박스를 2층으로 용접하고, 뒤편에 전경버스 차벽과 전경을 배치하는 등 ‘3중 방어선’을 구축했다. 또한 컨테이너가 넘어가지 못하도록 안에 모래주머리는 채워 넣는 등 완벽한 방어선을 만들었다. 이어 컨테이너엔 시위대가 오르지 못하도록 기름을 발랐고, 시위대 진정용으로 대형 태극기 2개를 걸었다. 이 컨테이너 박스이름을 ‘명박산성’이라고 온라인에 처음 등장했고, 이 이름은 숱한 파생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인터넷 이용자들이 참여해 꾸미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ko.wikipedia.org)에는 10일 “명박산성이란 2008년 6월10일 610 민주화 항쟁 21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열린 대규모의 시위에 대비하여 광화문 네거리에 설치한 컨테이너 박스를 대한민국 네티즌들이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라며 “한국 일부 국민들은 이에 대해 ‘이것이 이명박 식의 소통’이라며 조롱하고 있다”라는 용어 풀이가 나오기도 했다.
‘명박산성’, ‘국민과의 소통 거부한 장벽’이라고 불리며 조롱거리가 된 5.4m 높이 컨테이너 장벽은 하루만에 철거됐다. 아침에 출근하는 시민조차 “하루만에 철거할 것을 많은 트레일러 트럭을 동원해 컨테이너를 왜 쌓았나”며 “결국 저 비용은 우리세금으로 내는 거 아니냐”고 비난했다.
컨테이너 장벽은 일부 언론들이 2005년 11월 부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때 시위대 방어용으로 등장했다고 소개했지만 충북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시위 장소에서 컨테이너 장벽이 국내 처음으로 사용된 때는 2005년 3월 중순에 불법파견 중단을 요구하며 전면파업에 들어간 하이닉스-매그나칩반도체 청주사업장에 사용했었다.
새로운 문화코드 시민들 스스로 만든 것
이번 촛불집회에는 중고등학생들의 많이 참가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중고등학생들의 촛불집회 참가를 막기 위해 각 학교에 ‘촛불집회에 참여하지 말라’고 가정통신문 발송 종용 공문을 내보냈고, 교육감 등을 현장에 보내 중고학생들을 강제로 현장에서 끌어내는 등 표현의 자유를 막았다.
하지만 중고등학생들은 계속해서 촛불집회에 참여했고 수도 점점 늘어났다. 교복입고 촛불을 든 문화코드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배후설에 시민들 스스로 배후라고 자청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 시위 자금을 대는 사람들이 촛불 집회의 배후”라며 “촛불 집회 자금이 어디서 나오는지 조사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 시민들은 촛불집회 현장에서 “내가 배후다”라고 외치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열어 음료수 사 나누어 주었으며, 낮에는 수건을 나누어 주었다.
특히 비오는 날이며 우비를 대거 주문에 나누어주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또한 오이와 수박, 바나나가 등장했고, 주부들은 김밥을 싸서 나누어주었다. 학생들과 시민단체들은 초코파이가공수됐고, 집회현장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노점상들은 3000원 짜리를 2000원에 파는 등 파격할인으로 장사했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집회를 끝마칠 무렵 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거리를 청소하기도 했다.
외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밤샘 시위는 민중가요와 격렬한 구호가 사라지고 공연, 영화상영 등 새로운 문화가 형성됐다.
또한 경찰이 전경버스로 차벽을 만들면 시민들은 '불법 주차' 딱지를 붙이고, 꽃을 꽂고 그림을 그렸다. 한 단체의 퍼포먼스로 시작한 시민들의 낙서는 전경차 뿐만아니라 컨테이너 장벽에도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여러 문화코드와 비폭력과 질서유지로 등장한 이번 촛불집회는 한 단체가 아닌 스스로 참가한 시민들의 역할이 컷다. 시대가 발전과 변화하듯 시위문화도 변해간다. 시대가 발전하듯 정부도 발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또 정치권에서는 자작극 논란이 제기됐다. 한나라당은 김기보씨가 인터넷 게시판에 촛불시위 제안글을 올린 뒤 이를 자신이 기자로 활동하던 인터넷 신문을 통해 마치 제3자의 글인양 기사로 보도했다며 조작·선동이라고 비판했다.
김씨도 “유명해지기 싫어 다른 사람의 글인 것처럼 표현했다”며 이 사실을 시인했다. 네티즌 ‘앙마’를 2002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던 이 인터넷 신문도 논란이 심화되자 “제안자가 자신임을 밝히지 않고 ‘자유토론방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쓴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또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며 공식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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