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오후 경북 안동시 풍천면 김모씨 집에서 불이 나 김씨가 축사에서 소를 구한 뒤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해 숨졌다. 불에 휩싸인 축사에서 탈출하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소. 경북매일신문 제공“자식 같은 누렁이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면 불길 속을 뛰어 들었겠습니까.”
[연합통신넷= 안동 이형노기자] 가족들을 모두 객지로 보내고 ‘누렁이’에 의지하며 홀로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 자신은 찬밥으로 끼니를 때우더라도 누렁이에게는 늘 따뜻한 쇠죽을 쑤어줄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그런데 어느 날 축사에 불이나 누렁이가 화마에 갇히자 할아버지는 불길에 뛰어들어 누렁이를 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 8일 오후 9시쯤 경북 안동시 풍천면 인금2리 김모(64)씨 집과 축사에 불이 났다. 소방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과 축사, 창고까지 화염에 휩싸인 뒤였다. 이때 마당 한구석에서 시커먼 연기와 재를 뒤집어쓴 채 날뛰던 소 한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불길이 잡힌 뒤 축사 안에서는 김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안동소방서 관계자는 “김씨가 불이 난 축사에 소를 풀어주려고 들어갔다가 자신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며 “청각장애가 있는 김씨가 불길이 번지면서 ‘타닥타닥’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뒤늦게 축사에 뛰어들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신고는 이웃집 할머니가 했다. 그러나 불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번진 뒤였다. 마을 주민들은 김씨가 가족처럼 아끼던 누렁이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며 애통해 했다.
김씨는 2003년부터 암소인 누렁이를 키워왔다. 누렁이는 사람 나이로 현재 70세 정도다. 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누렁이와 단 둘이서 생활하면서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서울에 부인과 자식들을 보내고 혼자 농사를 지어온 김씨는 대대로 내려오던 밭을 지키겠다며 자식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혼자 고향에 남았다. 경운기가 없는 김씨에게 누렁이는 작업동료이자 친구였다. 밭을 갈거나 무거운 짐을 옮기는 등 궂은일은 누렁이가 대신해 줬다.
누렁이는 요즘 시골에서도 보기 드물게 잘 길들여진 ‘일소’였다. 이웃들은 누렁이에 대한 김씨의 애정이 각별했다고 입을 모았다.
마을주민 김휘규(53)씨는 “김씨가 평소 누렁이에게 좋은 사료만 골라서 먹이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다”고 말했다.
이날도 김씨는 쇠죽을 끓이려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고, 남아있던 불씨가 바람에 날리면서 축사로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 당일 안동지방에는 건조한 날씨에 초속 4m의 강한 바람이 불었다.
장례를 위해 안동에 내려온 가족들은 남겨진 누렁이를 더 이상 둘 수가 없어 이웃 축산농민에게 넘겼다.
누렁이를 구입한 이웃마을 권모(43·축산업)씨는 “누렁이도 충격을 받았는지 아직 사료를 잘 먹지 못하고 있다”며 “고인을 위해서라도 정성껏 돌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렁이는 화재 당시 유독가스를 많이 마신 탓에 임신한 것처럼 배가 잔뜩 부풀어 올라있다. 화마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콧잔등과 얼굴 등에 찰과상을 입는 등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권씨는 10일 오전 수의사를 불러 누렁이의 상태를 체크했다. 수의사는 “워낙 유독가스를 많이 마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