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무상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인생입니다. 수많은 철인(哲人)들이 수도 없이 인생이 무엇인가를 찾았으나 아직도 명쾌한 답을 얻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각자 찾아 최선의 답을 내 놓으면 그것이 인생의 의미 아닐까요?
그럼 왜 그 인생이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인생무상(人生無常)은 사람의 일생이 덧없이 흘러감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무상은 일체의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범어(梵語)로는 무상을 ‘아니탸(Anitya)’, 팔리어(Pali language)로는 ‘아니짜(Anicca)’로 인도 힌두교사상의 집약서인『우파니샤드(Upaniad)』에서 강조되었던 상주설(常住說)의 반대개념입니다. 즉, 현상계를 시간적으로 파악한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 무상이지요. 불가의 연기설(緣起說)은 이와 같은 무상관(無常觀)을 바탕으로 성립되었으며, 초기 불교의 근본교리인 삼법인(三法印 : 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상이란 만물은 항상 변하며, 영원한 실체로 존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물의 실상을 표현한 것이지요. 그러나 무상이라는 것이 불규칙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관련을 맺는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코 그것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연기설로써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因)과 연(緣)이 서로 결합하여 생겨난 모든 현상은 무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상관은 단순한 비관적(悲觀的) 허무적(虛無的)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항상 변화가 있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나 명예에 집착하는 탐욕을 버려야 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한 인생을 “왜 사느냐?”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물어본들 어느 누가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사람 사는 일에 무슨 법칙이 있고 삶에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세상에 나왔으니 순응하며 사는 것이 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니 저 무상한 인생에 무언가 움켜잡으려 한 대서 완전히 내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저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한 조각 흰 구름이 보이십니까?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지만 그 얼마나 여유롭고 아름다운가요? 그래서 진정 여유 있는 삶이란 가진 만큼 만족하고 남의 것 탐내지도 보지도 아니합니다. 그리고 남의 마음 아프게 아니하고, 누구 눈에 슬픈 눈물 흐르게 하지 아니합니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 가슴에 담고, 구름에 달 가듯이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정말로 최고의 인생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들은 저리도 잘 사는데’ 하고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삶의 고통이 있고 근심 걱정이 있는 법입니다. 아마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고통스럽고 우리네 보다 더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돈을 더 벌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우리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생으로부터 지은 업(業)이 각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비우고 고요히 사는 인생이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백년을 살 수 있을까요 아니면 천년을 살겠습니까? 한 푼이라도 더 가지려 아옹다옹 해 본들, 한 치라도 더 높이 오르려 안간 힘을 써서 올라 본들 인생은 일장춘몽입니다. 들여 마신 숨마저도 다 내 뱉지도 못하고 눈 감고 가는 길입니다. 마지막 입고 갈 수의에는 주머니도 없습니다.
그렇게 모두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이름은 남기지 못하더라도 가는 길 뒤편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받지 않도록 허망한 욕심 모두 버리고 떠나가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밑지고 삽시다. 가진 것 베풀고 비우고 양보하고 삽시다. 베풀 것이 없으면 세상을 위하여 맨발로 뛰며 덕이라도 쌓다 가십시다. 그저 그렇게 고요하게 살다가 조용히 따닐 수 있으면 이 무상한 인생 잘 살다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언제 떠날는지 모릅니다. 가다보면 서로 만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애절한 사연 서로 나누다 어차피 헤어질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며 살아도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베풀고 살아도 남는 것들인데 무슨 욕심으로 무거운 짐만 지고 가시려는가요?
왜 그리 못난 자존심으로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미워하고 살았는지 한 번 되돌아 봐야 합니다. 그리고 맺힌 것이 있으면 풀어야 합니다. 잘 못한 것이 있으면 일부러라도 찾아가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사람을 찾지 못하면 마음으로라도 용서를 빌거나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무상한 그 날이 오면 무거운 재물의 옷도, 화려한 명예의 옷도, 예쁘고 고운 모습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왜 더 사랑하지 못했는지, 왜 더 베풀고 살지 못했는지 참회의 눈물을 흘려 본들 이미 때는 늦습니다.
사랑한 만큼 사랑 받고, 도와준 만큼 도움 받습니다. 그것이 인과 아닌가요?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 몸부림쳤던 부끄러운 나날들! 우리가 서로 아끼고 사랑해도 무상한 세월입니다. 어차피 저 인생의 언덕에 올라서서 황홀한 낙조를 바라보다가 헤어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이제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공부와 사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최선인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은 피와 땀을 요구합니다. 공부와 사업에 <지성여불(至誠如佛)>의 정신으로 달려가면 우리는 궁극적인 만족을 얻고 가쁜 숨 내 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우주의 진리를 따르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또한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나를 성장시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인생무상입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 하고, 배려하며 베푸는 마음, 그것이 진정한 인생이 아닌지요!
I.단기 4349년, 불기 2560년, 서기 2016년, 원기 101년 12월 13일
II.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