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세월호 참사 단원고 생존자 4명 증언 다큐 방영
수학여행을 함께 떠난 친구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에 탑승한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 가운데 생존자는 고작 75명. 사고 이후 거의 1000일이 흐르는 사이, 생존 학생들은 교복을 벗고 어엿한 성인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시간은 250명의 친구를 잃은 '그날'에 멈춰 있다.
13일 한국교육방송공사(EBS) 1TV가 <다큐프라임> '감정시대 5부 - 스무 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 편에서 세월호 참사 단원고 생존 학생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장애진, 박준혁, 이종범, 양정원 네 사람이 용기를 냈다. 이들은 방송에서 참사 당일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친구를 잃은 슬픔에 대해 말했다.
이들은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부터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정원 씨는 "(인터뷰) 한다고 해놓고도 '왜 한다고 했지'"라고 했고, 장애진 씨는 "원래 이런 거 안 하려고 부모님이 세월호 관련 활동을 하면 사람들이 '당사자 아니지 않느냐'고 하니까 제가 하게 됐다"고 했다.
"'구조'라고 말하기가... 탈출, 저희가 했어요"
이들은 그날 참사 당시 '구조'는 없었다고 했다. 스스로 탈출했다며 그날 기억을 떠올렸다.
세월호 마지막 생존자 준혁 씨. 그는 구명조끼를 입은 채 바닷물에 둥둥 떠 있다가 어업지도선에 구조됐다. 구조된 지 4분 뒤 세월호는 급격히 침몰했다.
"벽이 바닥이 됐을 때 그리고 물이 차오를 때 그때 나와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대로 있으면 죽겠구나 싶어서'..."
정원 씨는 창문을 통해 해경, 헬기 바구니를 봤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구조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현장 구조 세력의 선내 진입은 끝내 없었다. 배 안의 짐이 쏟아지고 친구들은 객실 캐비닛 아래 깔렸다.
"제 바로 앞에 있던 애들이 캐비닛에 깔렸어요. 그걸 제 눈으로 봤어요. 진짜 '꽝' 소리가 났거든요. 캐비닛에 다리가 깔리거나 날아갔어요."
맞은편 방으로까지 날아가 광대에 큰 상처를 입은 정원 씨는 거기서 차오르는 물을 피해 대피했다.
"구조라고 하기 모호해요. 도와준 건 있지만 주된 탈출은 저희가 했어요."
물은 순식간에 배 안에 들어찼다. 정원 씨는 손을 허우적대던 친구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애들한테는 그게 제일 미안해요. 못 구해준 거."
허우적대는 친구의 손을 잡아주지 못해서, 친구에게 나오라고 전화하지 않아서, 그렇게 혼자 살아남아서, 이들은 괴로웠다.
인터뷰 도중 종범 씨는 눈물을 보였다. 그가 조용히 내민 지갑 안에는 친구 '재강이'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갑판 위에 함께 있었는데 먼저 객실로 내려가서 계속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안 물어보면 괜찮은 줄 알아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누구와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정원 씨는 생존 학생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병원을 나왔다. 정원 씨의 부모님은 사고 후 80일께 '이번 주에 나가지 않으면 평생 병원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사 말에 딸을 억지로 퇴원시켰다. 광대가 찢어진 자린 아물었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딸을 생각하며 부모는 눈물을 쏟았다.
집에 온 정원 씨는 매일 밤 잠들지 못했다.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렸다. 어렸을 때부터 했던 태권도를 다시 시작했는데, 벽에 세워놓은 매트를 본 뒤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다른 애들은 물은 무서워하거나 그러는데 저는 기우는 거에 좀 충격을 받아서... 기울어서 날아갔으니까."
언제나 부모님께 "괜찮다"고 했던 애진 씨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이를 좋아해 유아교육과에 가려던 애진 씨는 사고 후 진로를 바꿔 응급구조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교육 과정 중 스킨스쿠버를 할 때 물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났다.
"'엄마 나 울었어요. 무서웠어요' 라고 하더라고요. 물에 푹 들어가는 건 나은데 물장구치는 게 무서워서 못했다고..."
준혁 씨는 동갑내기 남자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대학에 가서 학생회 활동까지 했지만 그가 어울리는 건 동기가 아닌 선배들이다. 그에겐 '친구'라는 건 너무도 큰 존재였다.
"그런 부분은 잘 안 물어보더라고요. 맨날 사고가 어땠는지 그런 부분만 물어보지, 친구들의 빈자리 크지 않냐고 안 물어봐서 다 괜찮은 줄 안아요. 그런데 저에게는 친구들 빈자리가 좀 큰 것 같아요. 아직까지도 일상생활 하다가 (먼저 간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되면 느껴요. 친구들한테 많이 의지했으니까..."
여느 스무 살 또래처럼 운전 면허를 따고, 대학 수강 신청을 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기억하기 위해 늘 분투한다. 세월호 관련 행사에 참여해 많은 이들 앞에서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세월호 분향소에서 만난 희생자 친구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팔에 옅은 노란색 리본 모양의 문신을 한다.
이들에게 '기억'은 그들의 생존만큼이나 절실한 문제다. 그래도 이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많이 기억해주면 고맙고 그냥 나쁘게만 생각 안 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살아남은 자신들에게는 "우리 잘못 아니라고 살아와 줘서 고맙다.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살아남은 슬픔을 홀로 오롯이 껴안은 채 이들은 이렇게 스무살의 해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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