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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인생의 완성..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 칼럼] 인생의 완성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6/12/20 08:26

▲ 덕산 김덕권 선생, 원불교 문인협회 회장인생의 완성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간이 죽을 때가 되면 <껄껄껄>하며 후회한다는 우수개소리가 생각납니다. 즉, ‘마누라를 더 사랑해 줄껄, 인생을 좀 더 멋있게 즐길껄, 주위 사람에게 좀 더 베풀껄’ 하며 후회한다는 얘기지요.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옛 친구를 찾지만 그때는 이미 연락처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임종 시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떠나가기를 모두 바랍니다.
 

삶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은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가?’ 라고 성찰하게 되지요. 그리고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사색(思索)하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다. 내가 죽는다면 나의 육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지요. 로마제국의 황제이고, 스토아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0~180)’는 그의 명상록에서 ‘오늘 당신은 죽은 몸이라고 생각해라. 더 산다는 것은 덤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그 시간을 살아라.’ 라고 말했습니다.
 

노자(老子 : BC 1111?~BC 255)는 ‘좋은 죽음은 아름답다. 좋은 죽음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일 때, 또 죽음이 언제 어디에서 찾아온다 해도 그 동안 주어진 삶의 충만함에 깊이 감사할 줄 알 때 가능하다. 죽기 전까지 살아온 삶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하지 못하면, 존엄한 죽음이나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1955~2011)는 불교신자로 선(禪)에 심취해 있었는데 췌장암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서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명연설을 하였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이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는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시람 조차도 죽어서까지 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의 숙명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면 당신은 정말 잃을게 없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그러고 나서 그는 암이 재발하여 그로부터 6년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머리로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물질적으로 장례식 비용을 위해 상조회사에 가입하는 정도가 전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장례식 비용보다 죽음의 질을 성찰해야 합니다.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면 죽음이 실패도 불행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삶의 정점(頂点)과 완성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경제적 어려움이나 질병의 고통, 마음의 상처, 힘든 삶의 도피처로서 죽음을 마지못해 수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꾸준한 자기수행, 자기성장의 과정 없이 누구도 단번에 큰 깨달음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색하고 성찰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지요. 종교적 표현으로는 영적성장(靈的成長)을 통한 영혼의 각성은 하루아침에 얻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죽음의 사색을 놓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좋은 삶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죽음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자연의 현상이지요. 만물이 태어났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다만 일찍 오느냐 늦게 오느냐의 차이일 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주어진 삶에서 사람답게 사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티벳의 승려들이 소망하듯이, 죽음의 순간이 설령 눈부시게 밝은 빛과 하나가 되는 멋진 최후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죽음 앞에서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 아닐 런지요!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벽(壁)으로 볼 것인지 문(門)으로 볼 것인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이 크게 달라 질 수 있습니다. 1970년 중반부터 서구(西歐)에서 연구한 근사(近死 near die)체험 현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근사체험은 호흡이 멎어 사망판정을 받았으나 심폐소생술을 받아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의 일부가 겪은 죽고 다시 살아난 체험입니다.
 

그들은 터널을 통과해서 빛을 보고 교신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지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한다면, 죽음이 꽉 막힌 벽이 아니고 열린 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죽음이 임박한 중환자가 큰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죽으면 육신과 더불어 전존재가 소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시작인 것입니다. 벽이 아니고 새로운 문인 것이지요. 우리도 이제 죽음을 직시하고 사유(思惟)함으로서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으로부터 놓여나고, 죽음을 내포한 삶이란 끊임없는 내적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음을 거론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당하지 말고 죽음을 맞이하자는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인가요? 사람이 행할 바 도(道)가 많이 있으나 그것을 요약하면 생과 사의 도에 벗어남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 때에 생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생의 가치를 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에 사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악도를 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평소에 마음을 밝고 조촐하고 바르게 길들여, 육식(六識 : 眼 耳 鼻 舌 身 意)이 육진(六塵 : 色 聲 香 味 觸 法) 가운데 출입하되 물들고 섞이지 않을 정도에 이르면 모든 죽음의 준비를 끝내고, 생전 자신천도(自身薦度)까지 마쳐 비로소 인생의 완성을 맞게 되지 않을 런지요!
 

단기 4349년, 불기 2560년, 서기 2016년, 원기 101년 12월 2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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