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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정관의 다스림..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 칼럼] 정관의 다스림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6/12/22 09:38

▲ 덕산 김덕권 선생, 원불교 문인협회 회장정관의 다스림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 599년~649년)은 우리 역사에서는 고구려를 침략한 악당이지만 중국에서의 평가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2,000년 왕조사에서 중국인들이 최고의 '현군(賢君)'으로 꼽는 인물이지요. 그의 치세인 '정관의 치(貞觀之治)'는 중국의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평가되며, 그가 남긴 신하들과의 문답 집《정관정요(貞觀政要)》는 중국뿐 아니라 동양의 역대 통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세민 자체가 우리 사림(士林)의 기피인물이었기 때문에《정관정요》역시 우리의 역대 왕조에서는 그리 높게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정관정요》는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통치자의 교과서나 마찬가지로 여겨진 귀한 책입니다. 그중에서도 청나라의 건륭제(乾隆帝)와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이 책의 애독자로 특히 유명하지요.
 

이세민이 뛰어난 군주였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과연 그의 50년의 삶과 20년의 통치가 과연 '중국 역사상 최고의 현군'이라는 칭송을 들을 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를 핍박하고 형제의 피를 뿌리면서 옥좌를 차지했다는 점에서는 심각한 정통성의 문제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이세민은 최선의 선정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백성들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정변을 일으키고 나서 두 달 후 아버지 이연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세민은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해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고 조용조(租庸調)의 조세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수확물의 9분의 1과 1년 중 20일에 해당하는 노동력, 그리고 지역 특산물을 납부하는 것으로 모든 조세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정관율령(貞觀律令)’이라는 이름의 명문으로 공포되었습니다. 목표는 백성들의 세금과 부역을 가볍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군사 제도를 징병 제도로 전환하고 수양제 시절 폐지되었던 과거 제도도 부활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이세민이 강하게 의식했던 것은 전 왕조인 수나라의 통치, 특히 수양제의 폭정이었습니다.
 

이세민의 시대에 당나라는 내적으로 안정되고 외적으로도 왕조의 권위를 높여 ‘정관의 치’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러한 선정은 그의 뛰어난 용인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쓸 만한 인재라고 판단되면 정치적인 입장이나 과거의 관계는 상관하지 않고 등용해서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정관정요》에 등장하는 이세민의 신하들은 모두 45명이나 되지만 주연급에 해당하는 인물은 위징(魏徵), 왕규(王珪), 두여회(杜如晦), 이적(李勣), 방현령(房玄齡) 정도입니다. 이들 중에서 당나라의 개국 과정에서 최고의 공신으로 평가되는 위징은 수양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이밀의 휘하에 있다 항복해 태자였던 이건성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던 사람으로,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제거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현무문 정변 때 최우선적으로 체포되었는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이세민에게 “만약 황태자께서 내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면 오늘의 화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요.”라고 태연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세민은 이 말을 듣고 정중하게 옷깃을 여민 다음 그를 풀어주고 우리 역사에서 대사간에 해당하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했습니다.
 

이세민이 보여준 이런 식의 용인술은 단순한 '처세술'의 차원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관대함'과 '대범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타고난 천성에 더해 보통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간적인 매력이 바탕이 되어 각자 강한 개성을 지닌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충성을 받아낸 것입니다.
 

그 이세민의 부하인 위징이 말하기를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라고 했습니다.「수능재주(水能載舟) 역능복주(亦能覆舟)」즉,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한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군주(君主)와 백성(百姓)의 상호관계(相互關係)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말로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책의 서두(序頭)만 보더라도 당태종이 얼마나 백성의 관점에서 정치를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군주의 도리는 먼저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오. 만일 백성들을 손상(損傷)시켜 가면서 군주의 욕심을 채운다면, 마치 자기 다리를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서 배는 부를지언정 곧 죽게 될 것이오. (중략) 또 만일 군주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마디라도 한다면, 백성들은 그 때문에 사분오열(四分五裂)할 것이고, 또는 마음을 바꾸어 원한을 품고 역모(逆謀)하는 자도 생길 것이오. 나는 항상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고 감히 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행동을 하지 않았소.」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했기에 태종은 충간(忠諫)한 위징(魏徵)의 말을 늘 마음속에 새기면서 정치(政治)의 지침을 삼고자 했습니다. 그는 창업(創業)하는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하는 형제의 난을 겪으면서 제위(帝位)에 등극하였으면서도 문민정치(文民政治)를 실행하였습니다.
 

철저한 자기관리(自己管理)와 겸허(謙虛)한 지도력(指導力)으로 신하(臣下)들과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토론하면서, 백성들과 모든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함께하려고 노력했던 훌륭한 군주였습니다. 때문에 위징이 300번 이상 간언(諫言)을 하여도 사심(私心)없이 간언을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특히 민생안정(民生安定)에 온 정성을 기울여 부역(賦役)을 줄여주고 세금(稅金)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을 아꼈습니다. 또 형법(刑法)을 신중(愼重)하고 가볍게 사용하여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심문(審問)과 재판(裁判)과정을 전부 기록하고 법제(法制)를 보존시켰던 것입니다. 당태종이 다스린 23년여 제위기간(帝位期間)을 <정관의 다스림>이라고 하여 그 치적(治積)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박근혜 최순실 국정논단’의 어지러운 탄핵정국을 바라보며, 박근혜 대통령이 이 ‘정관지치’를 본받고 위징과 같은 신하를 두었던들 오늘의 이 불행한 사태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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