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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화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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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화담의 세계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01/21 09:43

화담의 세계


 
화담(和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화해(和解)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정답게 주고받는 말을 이릅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벌써 몇 달 째 전국각지에서 어김없이 촛불과 태극기가 떼로 모여서 서로들 자기들이 옳다고 억지를 부리며 세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애국심에 나라를 걱정해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면, 태극기를 들고 탄핵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의 마음도 당연히 이해하고 그들이 거리에 나온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양 극단의 사람들은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핏대를 올립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이 단 한 가지가 아닌 한,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서로 애국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자신이 선택한 방법만이 옳고, 타인의 방법은 무조건 틀리다는 생각은 나라를 망치는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요? 그런 이기주의이고 독재적인 생각이 왜 국민들에게 그리 깊게 각인되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기를 쓰고 틀리다고 매도 할 것이 아니라 양 진영이 서로 서로 화담으로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저는 그 길이 중도사상(中道思想) 중도정치(中道政治)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신을 합니다.


중도사상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나 실천면에 있어서나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圓融自在)한 대원리입니다. 이 사바세계의 현실은 모순 상극이어서 곳곳에 언제나 싸움이 그칠 사이 없습니다. 그 싸움 때문에 고(苦)가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순상극인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걸림 없는 자유의 세계, 해탈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원통(圓通) 자재한 중도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와 같이 양변(兩邊)을 떠나 가운데 (中)도 머물지 아니하는 중도사상만이 오직 참다운 평화세계를 이 현실에 구현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중도정치는 무엇일까요? 정치사회에서 대립하는 2개의 계층이 있을 때,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중간층 또는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정치를 말합니다. 이 중도주의(中道主義)는 우파와 좌파 혹은 보수와 진보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정책을 실시하자는 이념입니다.


이 중도(中道)는 불교에서 한 쪽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부처가 될 때까지의 6년간 그 대부분을 가혹한 고행의 길에 정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행도 고타마 붓다에 있어서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뿐으로서 참된 인생 문제의 해결은 되지 못했습니다.


출가 전의 고타마 붓다는 왕자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여 즐거움에 찬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러한 물질적인 풍족함만으로는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타마 붓다는 출가 전의 쾌락(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양극단을 버리고 고락 양면을 떠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을 자각하였지요. 성도(成道) 후 그때까지 함께 고행을 하고 있던 5인의 비구(比丘)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이 바로 이 중도의 이치였습니다.
 

중도는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입니다. 여기서는 나태 · 번뇌 · 노여움 · 어리석음에 의해서 부지 중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어떠한 치우침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이 강조됩니다.
 

이와 같이 불가(佛家)의 근본사상은 중도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처음 바라문계층의 수정주의자인 ‘아라다 선인(仙人)’과 ‘우드라가 선인’에게 그들이 체험한 극의(極意)를 증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지의 해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전변설(轉變說)을 주장하는 수정주의를 버리고 적취설(積聚說)을 주장하는 고행주의자들에게 가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6년 동안 갖은 고행을 다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지요. 그래서 고행을 버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공부해 마침내 대원정각(大圓正覺)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우주의 근본원리를 바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중도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가모니 부처님만이 우주의 근본원리를 바로 깨쳐 중도사상을 천양한 것이지요. 이와 비슷한 뜻으로 유교의《중용(中庸)》이 있습니다.《중용》이란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입니다.《중용》에는 “희 · 로 · 애 · 락(喜怒哀樂)이 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희 · 노 · 애 · 락이 나서 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和)라고 말한다.” 고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알고 보면 일체만법이 불법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도사상을 바로 알게 되면 금강경에서 “일체 만법이 모두 불법이다.” 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일체만법, 일체 모든 진리를 융합한 우주의 근본원리가 중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보면 예수교도 중도요, 유교 · 도교도 모두 중도사상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국 중도를 바로 알려면 부처와 마구니를 함께 다 버려야 합니다. 부처와 마구니가 서로 옳다고 싸우면 양변에 집착했기 때문에 중도를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중도사상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나 실천면에 있어서나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한 대원리이인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의 현실은 모순 상극이어서 곳곳에서 언제나 싸움이 그칠 사이 없습니다.


그 싸움 때문에 고(苦)가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중도가 곧 도입니다. 제발 촛불이나 태극기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화담의 세계로 나아가면 걸림 없는 자유의 세계, 맑고 밝고 훈훈한 덕화만발의 세계로 나아가지 않을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1월 19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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