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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권 칼럼] 공감(共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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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권 칼럼] 공감(共感)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02/16 08:00

공감(共感)


 

 

공감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남의 주장이나 감정,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감정, 의견, 주장 등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을 '공감'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지난 12월 저의 졸문(拙文)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부제(副題) <넓고 깊고 느리게>, 원제(原題) <사람아, 사랑아!>를 대원사 김남석 사장님의 배려로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부제 <넓고 깊고 느리게>의 ‘넓고’는 인간의 정신수양(精神修養)을 의미하고, ‘깊고’는 사리연구(事理硏究), ‘느리게’는 작업취사(作業取捨) 삼학(三學)을 표현한 것입니다.


 

첫째, 정신수양입니다.

정신이라 함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 심(分別心)과 주착 심(住着心)이 없는 경지를 이름입니다. 그리고 수양은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 심을 없이 하여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境界)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함을 이르는 것입니다.


 

둘째, 사라연구입니다.

사(事)라 함은 인간의 시 비 이 해(是非利害)를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理)라 함은 곧 천조(天造)의 대소유무(大小有無)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 대(大)는 우주만유의 본체를 이름이요, 소(小)는 만상(萬象)이 형형색색으로 구별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유무(有無)는 천지의 춘 하 추 동 사시순환(四時循環)과, 풍 운 우 로 상 설(風雲雨露霜雪)과 만물의 생 로 병 사와, 흥망성쇠의 변태(變態)를 이름이며, 또 연구는 사리를 연마하고 궁구(窮究)함을 말합니다.


 

셋째, 작업취사입니다.

작업(作業)이라 함은 무슨 일에나 안 이 비 설 신 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의 작용을 이름이요, 취사(取捨)라 함은 정의(正義)는 취하고 불의(不義)는 버림을 이름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삼학이요! 이렇게 <넓고 깊고 느리게>라는 부제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특히 ‘느리게’에는 평생을 바쁘게, ‘빨리 빨리’만 살아온 우리들의 인생에 ‘느림의 미학(美學)’을 표명한 것이지요. 또한 본제인 <사람아, 사랑아!>에는 인류애와 사색인종을 망라한 사해동포(四海同胞)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발로인 것입니다.


 

이런 저의 염원이 통했던지 이번 발간 된 저의 졸저(拙著)가 거의 다 매진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우리 사랑하는 덕화만발 가족들을 위해 남겨놓은 잔여분을 무료로 증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이 간절한 사랑에 공감하시는 덕화만발가족께서는 서둘러 신청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맑고 밝고 훈훈한 덕화만발 카페 <사람아, 사랑아! 신청하는 곳>에 성함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올려주시면 출판사에서 택배로 배송해 드릴 것입니다.


 

공감은 감상적 독해(讀解)를 하는데 독자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책을 읽는데 공감하지 않으면 효과적인 독서를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글의 종류에 따라 공감하는 내용이나 대상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주로 글쓴이의 주장이나 생각, 글을 쓰게 된 이유나 목적에 대하여 공감하는 것이 없으면 책을 읽었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주장과 그에 따른 이유를 읽고 독자 역시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한다면 그 글에 대한 공감을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학적인 글에서는 내용에서 다뤄지는 사건이나 인물 등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고 정서적 교감을 하여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글쓴이가 느낀 감정의 표현들을 읽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시켜 동질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공감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다행히 많은 독자들께서 큰 공감을 표해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책이 잘 쓰는 글은 아닐지라도 세상을 맑고 밝고 훈훈하게 하려는 뜻을 지닌 분들에게는 자신의 일로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장자(莊子)》<서무귀편(徐無鬼篇)>에 ‘공곡공음(空谷音)’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인적이 없는 빈 골짜기에서 들리는 사람의 발자국소리라는 뜻입니다. 즉, 적적할 때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지요. 은자(隱者)인 서무귀는 위(魏)나라의 중신인 여상(女商)과 이웃해서 살았습니다.


 

서무귀가 여상의 소개로 위나라 무후(武侯)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얼마 후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무후의 기뻐하는 웃음소리가 밖에서까지 들려왔습니다. 이윽고 물러나오는 서무귀에게 여상이 “이제까지 무후께서 이렇게 기쁘게 웃는 모습은 보지 못했소.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저렇게 기뻐하신 겁니까?”라고 물었지요.


 

서무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개나 말의 감정 법에 대하여 얘기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빈 골짜기에서 저벅저벅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기쁘겠소(逃空谷者 聞人之足音然 而喜矣). 하물며 형제나 친척이 옆에서 말하고 웃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더욱 기쁠 것입니다. 무후께서는 진인(眞人)의 말을 오래도록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듣고 몹시 기뻐하신 겁니다.”


 

여기서 ‘공곡공음’이라는 말이 유래됐습니다. ‘진인’이란 ‘참다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무위(無爲)를 일삼으며, 이해득실을 벗어나서 도(道)에 통달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넓고 깊고 느리게> 세상과 융화(融化)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던 것이지요.


 

또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때 듣는 기쁜 소식, 고독하게 지내고 있을 때 벗하는 기쁨, 어려울 때 용기를 주고 기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아니요” 할 때 “아니요” 하는 것이 도덕생활의 기초입니다.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것은 정의는 용기 있게 취하고 불의는 칼이 목에 들어와도 물리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세상 살고 갈 때에 의(義)가 넉넉해야 하고, 덕(德)이 넉넉해야 하며, 원(願)이 넉넉해야 합니다. 진리는 공정한지라 쌓은 공이 무공(無功)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넓고 깊고 느리게> <사람아, 사랑아!>에 공감하시어 큰 공을 쌓지 않으시려는지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2월 1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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