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용기
인생은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습니다. 죽음 앞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아니 죽음 뒤에 오는 삶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비겁해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면 내생에도 잘 살고, 이생에서 악업을 지으면 내생도 고단하게 사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세상의 일이 어찌 선택한 대로만 흘러가겠습니까? 그래도 중요한 순간이 오면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그 선택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람은 옳든 그르던 자기 마음그릇 내에서 판단을 해야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자기의 인생이니까요.
때로는 주변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라고 해도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을 함에 있어서 스스로가 살 수 있는 방안을 먼저 선택합니다. 즉,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부의 현자(賢者)들은 스스로를 죽이는 선택을 먼저 합니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서 세상이 바로 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범부와 현자의 차이는 이렇게 간단한 것에서 그 출발을 달리 합니다. 모든 인생에 있어서 적용되는 것 중의 하나가 ‘생 즉사 사 즉 생(生則死 死則生)’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살려고 발버둥치지 죽으려고 하는 자는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떳떳하고 당당한 배고픈 삶을 선택할 것인가요? 아니면 비굴하고 비겁한 배부른 삶을 선택할 것인가요? 물론 떳떳하고 당당하면서 배부른 삶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큰일을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임난불구(臨難不懼)’의 정신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장자(莊子)》<추수편(秋水編)>에 나오는 이 말은 인생의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데리고 광(匡) 땅에 갈 때, 공자의 제자 안극(顔剋)도 동행했습니다. 안극은 일찍이 노(魯)나라 장군 양호(陽虎)가 광을 공격했을 때 참여했었지요.
양호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이곳 사람들은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데다가 안극까지 있는 것을 보고는 공자 일행을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태연하게 거문고를 타며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자로(子路)가 무리를 뚫고 들어와 공자에게 말했지요.“선생님, 어찌 이렇게 즐기고만 계십니까?”
공자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리 오너라. 내 너에게 일러 주리라. 내 궁한 것을 꺼린 지 오래였으나, 그것을 면하지 못한 것은 천명이었고, 통하기를 구한 지 오래였으나, 그것을 얻지 못한 것은 시세였다. 요순(堯舜)의 때에는 천하에 궁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것은 사람이 모두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걸주(桀紂)의 때에는 천하에 통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것은 사람이 모두 지혜가 없었던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 그때의 형세가 그러했던 것이다. 물 위를 다니면서도 교룡(蛟龍)을 피하지 않는 것은 어부의 용기이고, 육지를 다니면서도 외뿔소나 범을 피하지 않는 것은 사냥꾼의 용기이며, 앞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오가도 죽음을 삶처럼 보는 것은 열사의 용기이며, 곤궁하게 되는 것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뜻대로 되려면 때가 되어야 함을 알며, 큰 어려움을 당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성인의 용기이다. 유(由, 자로)야, 자리로 돌아가라. 내 명은 정해져 있느니라.”
(孔子曰, 來. 吾語女. 我諱窮久矣而不免, 命也. 求通久矣而不得, 時也. 當堯舜之時而天下無窮人, 非知得也. 當桀紂之時而天下無通人, 非知失也. 時勢適然. 夫水行不避蛟龍者, 漁父之勇也. 陸行不避虎者, 獵夫之勇也. 白刃交於前, 視死若生者, 烈士之勇也. 知窮之有命, 知通之有時, 臨大難而不懼者, 聖人之勇也. 由處矣. 吾命有所制矣.)
이 모습을 보고 얼마 안 되어 광의 무사가 나와 공자에게 사과하고 말했습니다. “양호인 줄 알고 에워쌌는데 이제 보니 잘못되었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이 공자의 예에서 보듯이 과연 진정한 용기는 무엇인가요? 진정한 용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자진해서 말하고 뉘우치는 것도 진정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키우는 할아버지와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시내에 큰 볼일을 보러가시게 되어 소년과 말만 남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말과 초원을 뒹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 날 밤에 말이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고 소년은 말의 열을 내리려고 밤새도록 물을 먹이며 간호했지만 말은 싸늘하게 죽어갔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시자 소년은 통곡을 하며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 전 최선을 다했어요. 최선을 다해 말을 사랑했다고요!” “얘야, 말은 열이 날 때 절대 물을 먹여선 아니 된다. 넌 네 방식대로 말을 사랑한 거야. 말을 사랑하려면 네 방식이 아닌 말의 방식이어야 하는 거란다.”
혹여 우리는 내 자신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만 사랑하려 하지 않았나요? 그를 사랑한다면서 내 방식대로 그를 가두어 놓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때때로 그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나요?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원한다면 내 방식대로의 고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이 아닌 그가 원하는 무엇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상대를 위한 관심은 그가 아무리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를 위해 잠시라도 그를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방식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자신의 것을 내어 버리고 그 빈자리에 그의 것을 채우는 일이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요?
지금 두 달 넘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정국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대통령은 온 국민을 두 편으로 가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임난불구’ ‘사 즉 생’의 정신으로 진정한 용기를 보여주면 어떨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2월 3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