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통신넷= 임병용기자] 새해의 시작인 설날, 제2의 인생 출발선에 선 사람들에게 설날은 힘차게 도약대를 뛰어오르는 날이기도 하다. 여기, 남들보다 조금 특별한 각오로 설을 맞는 세 사람이 있다.
◈노숙생활 접고 새로 맞는 설…"다시 살아보려는 노력 알아주길"
정현석(50)씨에게 설은 이미 오래전 잊혀진 명절이었다.
'불량학생'으로 자란 정씨는 성인오락실에서 일하다 일식집을 차리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뇌졸중으로 잃고 아버지마저 쓰러지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
"뒤늦게 효도하고 싶었다"던 정씨는 식당 문을 닫은 채 병간호에 매달리는 동안 카드빚만 쌓였다. 사이가 벌어진 아내와도 끝내 파경을 맞았다. 병원비와 이혼위자료, 그리고 카드빚을 갚고 보니 그는 어느새 거리의 노숙인이 됐다.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멋대로 자란 머리카락과 수염, 온몸에서 나는 악취가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60kg 중반이던 몸무게는 35kg까지 줄었고, 이는 썩지 않아도 저절로 빠져 이젠 아랫니 하나만 남았다. 급기야 정씨는 2013년 봄 결핵을 진단받고 노숙인 결핵 환자 전문 치료 시설인 '미소꿈터'에 입원했다.
성프란시스 대학을 추천받은 건 그곳에서 만난 간호사로부터다. 노숙인을 위한 학교로, 정씨는 이곳에서 문학, 철학, 예술사 등을 공부하면서 지난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할 힘을 길렀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그는 현재 서울역 희망지원센터에서 노숙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올해 설에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10여년 만에 차례상도 올린다. 전문적으로 노숙인들을 돕는 요양보호사가 되기 위해 정부지원금과 월급을 쪼개 학원에도 다닐 계획이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소식을 몰랐던 딸과도 연락이 닿았다는 정씨는, 딸의 사진을 꺼내 보이며 눈물을 훔쳤다.
"연락이 끊겼던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다시 살아보려 열심히 노력한다는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습니다."
◈일폭탄 떨어지던 설날이 조리 작품 전시회 날로
지겹도록 설 명절을 치른 박남순(63)씨이지만 이번 설은 특별하다. 예비조리사로서 가족들에게 실력을 뽐낼 수 있는 날이 됐기 때문이다.
12살 무렵 어머니를 여읜 박씨는 5남매 중 셋째였지만 언니 오빠가 이미 결혼을 한 바람에 집안 살림과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박씨는 "설날을 맞아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냇물에 빨래하고 꽁꽁 언 손을 녹이느라 손에 소변을 누기도 했다"며 "새 어머니가 맛있는 명절 음식은 숨겨놓고 못 먹게 해서 서러웠던 기억도 난다"고 말했다
경북 경주의 양반 가문 며느리가 된 뒤 설날과 같은 명절은 오히려 더 큰 일폭탄이 떨어지는 날이었다. 시댁 식구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홀로 명절 음식을 만들 때면 남몰래 울곤 했다.
다시 자기의 인생을 찾은 건 뒤늦게 향학열을 불태우면서부터. 40~80대 여성 만학도를 대상으로 하는 서울 일성여자중고를 다니며 배움의 기쁨을 만끽했다. 지난 16일 열린 여고 졸업식에서 박씨는 개근상과 봉사상, 임원근무상까지 받았다.
곧바로 배화여자대학교 전통조리학과에 입학하는 박씨는 이번 설이 기다려진다. 전문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회' 날이 됐기 때문이다.
"한식자격증을 따려면 50여 가지 음식 조리법을 알아야 하는데, 요리학원에서 40가지를 배웠어요. 맛있는 음식으로 손자들에게 '우리 할머니 최고'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조리학도가 된 박씨의 말이다.
◈'사장님'으로 맞는 설…휴일 없이 15시간씩 일해도 행복
사람들이 가족들과 즐거운 명절을 보내는 이때, 김정실(58)씨는 하루 15시간씩을 일한다.
10여년간 주방기기 회사에서 일하던 김씨는 지난해 봄 회사를 그만두었다. 또다른 일자리를 찾았지만 정년이 코앞인 그를 고용하려는 회사는 없었다. 딸의 등록금은커녕 당장의 가족 생활비를 마련할 길도 막막해진 상황. 고민 끝에 경남 김해에서 편의점 문을 연 것은 지난해 9월이다.
하지만 준비 없이 시작한 사업은 생각같지 않았다.
"일하기 전엔 손님만 맞으면 될 줄 알았는데, 매장을 청소하고 물품을 진열하는 일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더라고요."
창업 후 처음 맞는 명절인 이번 설에, 더이상 '월급쟁이'가 아닌 '사장님'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고 있다. 연휴 내내 쉴 수도 없고, 아르바이트생은 오전에만 고용해 하루 15시간씩을 일한다. 그동안 직원으로서 선물을 받는 명절이었지만 이제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선물을 챙겨줘야 하는 명절이다.
"용기를 내 창업한 덕분에 온 가족이 살 길이 열렸다"며 소리 높여 웃는 김씨.
"정산금을 손에 쥘 때 가장 행복해요. 열심히 일해서 내년 설 무렵엔 편의점 한 곳을 더 차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