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유대인 학살에 사과했다고 해서, 유대인이 히틀러의 묘소에 가 참배할 수 있나?"
[연합통신넷= 심종완기자] 당 '대표'가 아니라 당 '대포'가 되겠다고 선언한 정청래 최고위원의 첫 포문은 '아군 지휘부'를 향했다. 문재인 당 대표가 2월9일 첫 일정으로 결행한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 참배를 겨냥해 "유대인의 히틀러 묘소 참배"에 비유한 것이다. 주변에서 만류하자 "사전조율이 없었다. 가겠다고 한 사람만 가라"며 거듭 포탄을 날렸다. 제1야당 지도부의 첫 공식일정은 반쪽이 났다.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정치인으로서 되먹지 못한 막말"이라며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지난 14일, 포탄은 다시 날았다. 이번엔 '적진'을 향했다.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향해 "김 대표님, 참 두껍습니다"라는 트윗을 날린 것이다. 항상 '주변이 아닌 중심'을 표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의 '방포술'은 일관됐다. 하지만 여론은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겨레> 사설도 "야당을 멍들게 하는 튀는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회 윤리위 제소'라는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야당 내부에서도 매우 부담스럽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기적인 정치인', '진영논리를 강화시키는 정치인'이란 평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쫄지' 않는다. 망설임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팬 때문이다. 13만명의 팔로어들이 그의 든든한 '뒷배경'이다.
2000년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출범한 이래 유사 형태의 정치인 팬클럽들이 여럿 생겨났지만,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은 정봉주 전 의원의 '미권스'(정봉주와 미래권력들·cafe.daum.net/yogicflying)가 사실상 유일하다. 정치인들이 지지자들을 만나는 플랫폼 자체가 변하면서 온라인 팬카페의 기능과 위상이 크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2011년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중심의 정치활동은 지지그룹을 정치인들이 개설한 에스엔에스 계정으로 모이게 만들었다. 여기엔 '리트위트' '좋아요' 등 트위터·페이스북의 1대1 추천 기능이 메시지의 확산력 면에서 온라인 팬카페보다 탁월하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팔로어를 과거 정치인의 팬덤과 비교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팔로어들은 이전의 '팬'클럽처럼 균질하지 않다, 에스엔에스라는 특유의 개방성과 익명성 때문이다. 노사모처럼 오프라인 상의 조직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만 지지자들이 개별적으로 자신이 따르는 정치인과 직접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수평적 플랫폼은 이전의 수직적 관계보다 '참여'의 자존감을 높여 지지의 지속성을 높인다는 게 에스엔에스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래서 팬덤의 '강도'는 예전에 못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지지자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의 트위터 팔로어는 72만여명까지 늘어났다. 박원순 시장은 100만명을 넘는다. 이들은 조직화되지 않았지만 단일한 목소리를 '듣고' '참여한다.'
계정을 운영하는 방식에 따라 지지자들의 반응양식도 다르다. 대표적으로 정청래 최고위원과 문재인 대표는 팬(지지그룹)과 에스엔에스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정 최고위원은 참배를 둘러싼 그의 발언에서 보듯 구사하는 언어가 정치인의 것이라기보다 폴리터리안에 가깝다. 문 대표의 발언이 72만명을 향한 선언적 의미가 강하다면, 정 최고위원의 트윗은 보다 충성도 높은 팔로어들과 1대1로 교감하기 위한 목적성이 두드러진다. "나는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정 최고위원의 자신감 이면에는 1대1로 교감하는 에스엔에스 지지층이 그만큼 확고하다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열성적 지지자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정 최고위원의 대중성은 전당대회 당시 컷오프를 걱정해야할 정도로 당 내부에서는 탄탄하게 자리잡지 못했다. 실제 정 최고위원은 2월8일 전당대회 당시 현장투표에서는 최고위원 후보 8명 가운데 가장 낮은 지지를 받았다(국민여론조사에서의 압도적인 지지가 2등 최고위원 자리로 그를 밀어올렸다.)
에스엔에스 기반의 팬 관리가 정치인들에게 든든한 뒷배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자와 안철수 후보 지지자들이 벌인 에스엔에스 공방전은 상대인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는 "2012년 10월부터 문재인·안철수 후보 지지자들이 에스엔에스상에서 격렬하게 싸움이 붙었는데, 그 덕분에 박근혜 후보에 대한 긍정적 언급이 부정적 언급을 훌쩍 넘어서는 결과를 낳게 됐다. 그해 10~12월 키워드별 긍정어 분포를 조사해보니 박근혜는 긍정어가 44%였던 반면, 문재인은 20% 중반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자극적인 말로 지지자를 가장해 상대 정치인을 공격하면 무익한 갈등이 커지는 경우도 흔하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기때문에 상대가 누구인지 구분하기도 힘들다. 실제 국정원이나 군 사이버사령부 댓글 요원들은 야당 정치인의 발언을 무조건 반대만 한게 아니라 찬성과 반대를 적절히 섞어가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작전을 폈다.
모든 정치인 팬덤이 에스엔에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만은 아니다. 고전적 의미의 정치인 팬클럽인 '미권스'는 '나꼼수' 열풍이 한창일 때 회원 수가 20만명을 넘나들었다. 지금도 17만여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 정봉주 전 의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비케이 의혹 제기' 때문에 법원에서 10년의 자격정지를 받은 상황에서도 그렇다. 회원들은 이를 모르지 않는다. 오히려 문패처럼 '미래권력'이라는 점에 더 흥미를 느낀다.
"정봉주 말고 팬클럽있는 정치인이 또 있나"라는 정 전 의원의 자신감은 근거가 있다. 노사모처럼 조직적 실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미권스의 대중동원력은 발군이다. 실제 지난해 말 팬클럽 송년회를 서울 강서구의 한 체육관을 빌려 진행할 정도로 미권스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다. 정치적 현안마다 미권스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밥퍼'라는 아이디를 가진 한 회원은 세월호 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팽목항에서 밥을 짓는다. 다른 회원은 세월호 가족들의 운전기사를 자처하기도 한다. 정 전 의원이 관심을 갖고 있는 원전이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과 같은 주제의 강연에도 미권스 회원들로 붐빈다. 정 전 의원은 "인터넷 커뮤니티보다 에스엔에스의 확장성이 크다지만, 에스엔에스 기반으로 옮길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다만 다른 정치인들이 에스엔에스를 기반으로 발언력을 확보한다면, 정 전 의원은 팟캐스트 <정봉주의 전국구>로 그 기능을 대체한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예비하는 정치인들은 본격적으로 지지자를 불러모으고 있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에는 노사모라는 새로운 형태의 팬클럽이 있었다. 에스엔에스 기반의 지지 그룹은 과거의 팬클럽만큼 조직적 결속력이 강하지는 않지만, 1대1 팬덤현상은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다. 하지만 정치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팬덤은 10대 청소년들의 연예인 팬덤과 유사하게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한 맹목적 옹호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향한 과도한 공격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정치인 역시 열광적 지지자들의 외눈박이 여론에 도취해 객관적 관점을 상실할 위험성도 농후하다. 자발성·적극성이라는 정치인 팬덤의 긍정성에만 찬사를 보낼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