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의 끝
우리가 정치와 이념이 서로 달라 피가 터지게 싸우더라도 승패가 결정 나면 어느 쪽이라도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아무래도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몹시 불편합니다.
불복(不服)은 어떤 명령이나 결정 따위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제 삼성동 사저로 돌아온 박근혜 전 대통령 첫 발언은 명백히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 대한 불복선언을 한 것 같아 여간 국민을 답답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유야 어쨌든 온 나라를 불안의 소용돌이에 몰아 놓았던 대통령이 국민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불복을 선언한 것은 전혀 납득이 안 갑니다.
국가 최고헌법기구인 헌재의 평결을 승복하지 않고 오로지 본인의 ‘진실 규명’만을 외치는 모습은 92일 동안 온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대통령치고는 국민들에게 너무나 후안무치한 모습으로 비춰진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태를 좋아 할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끌어내리는 모양은 여간 슬픈 일이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처신은 참으로 우리 정치사에 불행한 오점을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우리 정치의 병폐였던 불복의 문화를 이번에도 그녀가 보여준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정치는 다시 수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박근혜는 이제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닙니다. 그녀가 보여준 국론분열의 사례는 두고두고 우리 정치의 발목을 잡을 것이 분명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인용결정 발표가 난 뒤 이틀 동안 아무런 입장 표명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다가 3월 12일 청와대를 퇴거하고 삼성동 자택에 도착한 성명에서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는 메시지는 그나마 측은지심을 보이던 국민들을 여간 실망시킨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의 탄핵불복 선언이지요. 박근혜는 최소한의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탄핵 인용 뒤 그를 지지하던 사람 중 3명이 사망하는 불미스런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경위야 어찌되었던 세 번이나 성명을 발표하며 사과를 하던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일체의 사과나 유감 표명도 없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최소한의 반성과 국력 낭비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의식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박근혜’ 개인의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진실 규명만을 외친 것이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닙니다.
박근혜는 자택에 도착한 뒤 마치 금의환향한 대통령처럼 도열한 측근들에게 환한 웃음을 보냈습니다. 탄핵을 당한 대통령으로서의 최소한의 품격과 겸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요. 이는 마치 지난 1995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 앞 골목 성명서 낭독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12.12와 5.18 내란 사건에 대한 검찰 재수사로 소환을 앞둔 그는 성명서를 낭독한 뒤 고향 합천으로 측근들을 끌고 내려가 버렸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검찰의 태도는 더 이상의 진상 규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라고 하며 법 집행을 거부하고 저항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불법행위를 정치적 공세로 규정해 모면하려는 것은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비열한 불복 술책인 것 같습니다.
이는 ‘국민들이 곧 국가’라는 헌법정신을 망각한 것입니다. 여전히 국민들을 통치해야 하는 아랫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생기는 권력자의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박근혜는 자신의 헌법 위배 행위를 ‘진실규명을 위한 고난의 길’로 바꾸려 하는 모양입니다. 이제 정치적 핍박을 받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연출하려는 것 이지요.
하지만 이런 행위는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기본 책무를 망각한 채 한국 정치를 후진국 수준으로 떨어뜨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헌재의 탄핵에 불복하여 한국 정치를 다시 수 십 년 전 수준으로 되돌려 놓은 것 같네요.
정치의 첫 번째 가치는 승리를 존중해주고 패배를 승복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설사 억울해도 자신이 인정하고 약속했던 경쟁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게 정치인 것입니다. 지난 번 미국 대통령 선거 때, 힐러리가 트럼프에게 득표에 이겼으면서도 선거인단과 전국 득표율의 차이로 인해 패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결과 발표 뒤 수 시간 내에 트럼프에게 축하전화를 걸고, 선거패배를 승복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패배의 모습인가요? 이런 것이 전통으로 자리 잡은 민주주의의 성숙도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박근혜는 그런 아름다운 패배의 전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박근혜의 불복은 우리의 정치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발목이 잡히는 불행한 단초를 제공한 꼴이 됐습니다. ‘어차피 탄핵이 된 마당에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나에게는 20%의 묻지 마 지지 세력이 있다. 절대 호락호락하게 나 혼자 죽지는 않는다.’
이런 계산이 섰다면 순순히 헌재 평의 결과를 승복하기보다 지지 세력을 등에 업고 끝까지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게 유리하다고 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핍박받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살아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론에 강하게 맞서 이 판을 형사사건이 아닌 정치적 명분 싸움으로 돌릴 속셈인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국가 이익은 안중에도 없고 진영논리의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가려는 게 박근혜가 2박 3일 동안 침묵하며 생각해낸 묘수, 즉,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는 불복의 메시지 인 것 같네요.
정말 불복의 끝은 어디일까요? 대의(大義)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은 살아도 가치 없는 인생이요, 죽어도 값없는 죽음입니다. 증오는 필경 무의미한 투쟁으로 공연히 국민에게 해만 끼칩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로잡고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 반성을 하시지요. 그리고 국민들의 용서와 관용을 빌며 탄핵의 결과에 승복하면 아마 어느 정도 명예가 회복 되지 않을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3월 14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