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김원기 기자]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창립 등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제4회 송재 문화제’가 오는 8일 오전 11시 서재필기념공원(전남 보성군)에서 열린다.
(사)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이사장 김중채)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행사에는 이용부 보성군수 등을 비롯한 각계인사, 회원, 학생,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사 보고, 추모 기도, 내빈 추모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송재 서재필 선생(1864. 1. 7.~1951. 1. 5.)은 전남 보성에서 출생했다. 1882년 3월 문과에 급제해 서적 발간을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로 활동하던 중, 당대 개화사상의 거두인 김옥균 등과 함께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 정부가 망명객들을 박해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고, 고학으로 미국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894년 7월 본국의 갑오개혁 추진 내각에 의한 사면령으로 1895년 12월 귀국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해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했고, 1896년 7월 국내 동지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해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쳐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했다.
또한, 1898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 궐기대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과 개혁에 대한 국민의 자주 독립 사상과 자유 민권 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고,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서 외교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명서를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대한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평생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광복 후 일시 귀국해 과도정부의 특별의정관에 선임되기도 했으나, 6.25전쟁 발발 후 조국의 불운한 명운을 통탄하다 미국에서 1951년 1월 서거한 후 1994년 4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에서는 서재필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김원기 기자, coolkim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