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방화범 재판 후 3년… 성인범이 된 정모씨
▲ 재판 6개월 후 세상에 나오니
정치인·변호사·시민단체 ‘내밀었던 손’ 사라지고
세상은 달라진 게 없었다
▲ 할머니 반지 팔아 다시 가출
다문화 가정 자녀 쉼터서 검정고시 합격,
희망 찾지만 다시 자동차 절도…
▲ “외국에 못 간다면 산속에라도 들어갈래요
여기 있으면 자꾸 ‘일’이 생기잖아요”
[연합통신넷= 온라인뉴스팀] 함박눈이 내리던 지난 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성동구치소의 한 재소자 접견실. 먼지가 잔뜩 끼어있는 유리창 너머로 하늘색 수의를 입은 정승호씨(21·가명)가 앉았다. 큰 눈망울, 뾰족한 턱, 길이가 2㎝ 정도 되는 까까머리. 왼쪽 가슴엔 큼지막한 네 자릿수의 번호가 적혀 있다. 이곳에선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린다. 째깍째깍. 1평 남짓한 방 어디에도 시계는 없지만 머릿속에서 초침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10분밖에 안되는 접견 시간이 아까운지 정씨는 오른쪽 손가락으로 연신 책상 바닥을 문질러댄다. 3년 전 동네에 불을 지르다 붙잡힌 소년범은 어느덧 성인범이 되었다.
정씨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러시아인이다. 정씨가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어머니는 가족을 떠났고 아버지는 강도로 사망했다. 갓난아이인 정씨를 할머니가 한국으로 데려왔다. 처음엔 번듯한 5층 빌라에서 살았지만 할아버지가 하던 시멘트 사업이 부도난 뒤 가세가 기울었다. 반지하집으로 이사를 갔다. 할머니는 무서운 존재였고, 할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정씨는 ‘엄마’라는 단어가 가장 싫다고 했다. 실은 그리움에서 온 원망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놈~” “야! 튀기!”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정씨가 혼혈이라는 것을 안 아이들은 그를 놀려댔다. 중학교 땐 더 심해졌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는 “소련놈”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은 정씨에게 전화를 해 “돈을 가져오라”고 협박했고, 집에 찾아와 옷을 빼앗아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또래들의 따돌림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문제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보통의 아이들이 이를 치유하기 위해 ‘꿈’ ‘희망’을 생각한다면 정씨에겐 ‘포기’ ‘반항’이 쉬워보였다. 그는 학교도 가지 않고 한강으로 발길을 돌렸다.
졸리면 한강 둔치와 잠실대교 아래에서 돗자리나 이불을 깔고 낮잠을 잤다. 저녁이 되면 앵벌이를 했다. 돈이 좀 생기면 담배와 컵라면을 샀다. 15살 때부턴 한강에 있는 노숙인들과도 친해졌다. 김찬수(가명)라는 50대 아저씨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줬다. 김씨는 정씨에게 이따금씩 먹을 것을 나눠줬고 다른 노숙인들도 소개해줬다. 여름엔 뚝섬에서 사람들이 먹다 남긴 치킨, 피자, 맥주를 가져다 먹었다. 노숙인들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욕을 하지도 않았고, 선생님처럼 공부를 하라고 야단치지도 않았다. 모든 게 어색한 어두컴컴한 반지하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그에게 한강은 ‘천국’이었다.
할머니는 정씨를 몰아세웠다. 그는 할머니가 휘두른 허리띠 버클에 맞아 머리에서 피가 나자 동네 구멍가게에서 산 소주로 상처를 소독하고 남은 소주는 그대로 들이켰다. 17살이 되던 해, 정씨를 찾아다니던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 여느 때처럼 한강에서 놀던 정씨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까지 뛰어갔다. 가끔씩 미울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친척들은 정씨를 업신여겼다. “야! 뭘 잘했다고 울고불고 난리야!” “또 집 나가라.” 정씨는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금세 깨졌다. 한번은 할머니가 그의 꿈에 나타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을 차려주었다. ‘나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이 자꾸만 마음을 옥죄었다. 정씨는 그때부터 성격이 바뀌었고 이듬해 3월 집 근처 몇 곳에 불을 지른다.
경찰에 붙잡힌 정씨는 “인종차별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에게는 “심심해서 불을 질렀다”고 했다. 저학년 학생들을 괴롭혀 돈을 빼앗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동네 아주머니에게 던지곤 했던 그는 누군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재밌다고 했다. ‘악동 놀이’였다. 버림받은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정씨의 사연은 신문 기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름만 대면 아는 정치인, 변호사, 시민단체들이 그를 보살펴주겠다며 줄줄이 연락해왔다. 국회의원들은 정씨를 선처해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정씨는 법원에서 정신병원 2개월 입원, 대전 청소년 보호치료시설(효광원) 위탁과 보호관찰 1년6월을 선고 받았다. 재판장에게 보내는 편지에 정씨는 “앞으로 긍정적이고 활기차게 살아보겠습니다! 이젠, 더 이상 할아버지가 눈물 흘리시게 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새 출발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다 찾은 서울 은평구의 한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그는 낯설고 두려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눈의 초점이 풀려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사람, 삐쩍 말라 눈이 움푹 팬 사람과 함께 병실을 썼다. 정씨는 “내가 제일 정상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병원은 처방은 할 수 있었지만, 진정으로 그를 껴안지는 못했다. 상담도 형식적이었다. 간호사에게 빌려 혼자 김찬수 아저씨한테 배운 화투를 치거나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며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게 그나마 그곳에서 하는 일이었다. 이곳에선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했지만 가끔 보호사들이 피우고 들어오는 담배 냄새 때문에 정씨는 더 미칠 지경이었다. 병원을 나오며 달라진 것은 단 하나, 스트레스 때문에 살이 빠졌다는 것뿐이었다.
효광원에서 지내는 4개월 동안엔 비슷한 또래의 소년범들을 만났다. 지방의 소년원에서도 아이들마다 급이 나뉜다. 다른 소년범들의 부모들은 면회음식을 잔뜩 만들어오지만 정씨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할아버지는 치킨과 햄버거, 콜라가 전부였다. 수십명을 좁은 공간에 빽빽이 밀어넣고 ‘격리’만 하는 일반 소년원과 달리 효광원은 보호와 치료에도 신경을 쓰지만 힘센 놈이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건 마찬가지다. 정씨는 효광원에서 나온 날 예전에 함께 방화를 저질렀던 친구와 만난다.
고작 6개월 남짓 흐른 뒤였는데 정씨가 세간의 화제가 됐을 때 제발로 찾아왔던 사람들은 관심을 끊어버린 뒤였다. 그를 보살피겠다던 한 선교사는 갑자기 사정이 생겼다며 연락을 끊어버렸다. 또 다른 시민단체에서는 정씨 나이가 너무 많다며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정씨를 입양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던 운동가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2013년 5월, 정씨는 집에 있던 할머니의 반지를 팔았다. 또 가출을 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술을 사먹고, 돈이 떨어지면 성당 근처에서 앵벌이를 했다. 서울역에서 잠을 자다 사람들에게 이끌려 정체 모를 봉고차를 탔다. 도착한 곳은 노숙인들을 데려다 치료해주고 수익을 올리는 경남 의령의 한 병원이었다. 며칠간 병원에 머물렀지만 여기서도 정씨는 거절당했다.
방화 전과를 본 병원 측에서 불을 지를까 무섭다며 받아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내가 불을 질렀으면 진작에 질렀지. 이제 난 불을 안 지르고 죗값을 치르고 나왔는데 내가 왜 또 불을 지르겠는가.” 봉고차는 다시 정씨를 서울역에 내려놓았다. 몸에선 악취가 진동했고, 가방 안엔 곰팡이 핀 떡과 지저분한 옷가지들만 있었다. 처참한 몰골만큼이나 마음은 문드러져갔다.
한 집사의 손에 이끌려 정씨는 서울 가리봉동의 한 쉼터로 간다.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한 달간은 술 담배도 끊었다. 모두가 자고 있는 새벽, 불꺼진 방에서 정씨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젠 쉼터가 완전 내 집인 것 같다. 포근하고 편안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쉼터…. 난 그 쉼터에서 점점 나아지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점차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2013년 7월26일 오전 3시11분.”
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컴퓨터에 남기고는 다시 사라졌다. 그해 가을과 겨울 내내 정씨는 소식이 없었다.
서울소년원에서 할아버지에게 연락이 온 것은 지난해 1월이다. 정씨는 효광원에서 만난 친구와 충주에서 자동차를 훔쳐 탔다 경찰에 붙잡혔다. 주 1회 보호관찰소에 출석하면 되는 보호관찰 처분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도 밝혀져 서울가정법원에서 9호 처분을 받고 춘천소년원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정씨는 다른 아이에게 기물을 집어던져 상처를 입힌다. ‘왜 그랬느냐’는 집사의 질문에 정씨는 “자꾸 절 놀리잖아요”라고만 했다. 남의 비아냥에 욱하는 성격은 날이 갈수록 드세졌고, 스스로의 행동도 제어할 수 없었다. 7월 말 퇴소한 정씨는 12월 술을 마신 뒤 다시 오토바이를 훔쳤다.
올해 76세인 할아버지는 노구를 이끌고 일주일에 한번씩 정씨를 보러 구치소를 찾는다. 할아버지는 “손자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한숨을 쉬면서도 “승호가 머리는 좋다. 대학에 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뒷바라지를 하지만 내가 죽은 뒤엔 어떻게 해”라며 이따금씩 눈시울도 붉혔다. 집사는 “승호는 형편 때문에 제대로 집중 심리치료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정씨가 주로 일삼았던 절도와 가출이 감정적인 결핍에서 오는 것 같다고도 했다. 이미 찍힌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정씨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다.
“접견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스피커에서 매정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년 1월 교도소에서 나오면 뭘 하고 싶으냐’고 묻자 정씨는 다시 희망을 말했다. “이번에 나가면 한국 뜰 거예요. 호주로 갈 거예요. 장난 아니에요. 한국에 있으면 자꾸 일을 만드니까 외국으로 가려고요. 외국에 못 간다면 한국에서 산속에 들어가서 살 거예요. 잘 살 거예요.”
방화범으로 붙잡혀 첫 공판을 위해 호송차를 타고 법원으로 가는 길,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차창 밖으로 보며 정씨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은 잘 살려고 노력하는데 난 지금 왜 이런 곳에 있을까, 난 왜 그랬을까….” 가족의 붕괴, 다문화, 내면의 상처를 보듬기엔 부족했던 도움의 손길들. 한국 사회는 그렇게 정씨를 방치했다.
소년범에게도 봄이 올까. 접견실을 뒤돌아 나가는 그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