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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온 3.1절, 독립후손을 생각..

다시 온 3.1절, 독립후손을 생각

김현태 기자 입력 2015/03/01 12:11
[잊혀진 3·1절] “물려받은 건 가난뿐… 원망 많았지만 그래도 존경합니다”

못 이룬 친일 청산…”반민특위 정신 잊지 말아야”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아들 김정륙 씨

 

[연합통신넷= 김현태기자]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은행 건물 주차장 입구 왼편 구석. 한 대리석 표석이 주변 풍경과는 이질감을 풍긴 채 자리 잡고 있다.

    
 ▲ 반민특위터 표석: 서울 중구의 한 은행 건물 주차장 입구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자리임을 기념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1999년 세운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새겨진 글귀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여기가 광복 후 친일파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담당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본부가 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민특위는 제헌헌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친일파 척결’을 내걸고 1948년 10월 설치된 특별 기구로, 수사권과 기소권은 물론 재판권까지 가졌다.
 

초기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 유명인을 포함한 1천명에 가까운 인사들을 조사하며 큰 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정권의 비협조로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1년 만에 해체됐다.
 

광복 70주년인데다가 96번째 3·1절을 맞은 뜻깊은 날이지만, 수년 전 원래 위치에서 약 2m가량 옮겨진 이 표석과 반민특위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은 무척이나 적었다.

지나가던 회사원 이모(29)씨는 “반민특위라는 조직 자체도 생소하고 그 본부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며 “이 건물터에 역사적 의미가 있었는지 몰랐다”고 무심하게 말했다.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았던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의 아들인 김정륙(80)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은 이런 무관심한 세태를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김 부회장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아직도 친일 청산은 이뤄지지 못했는데 반민특위가 점점 잊혀 가고 있다”며 “광복 70주년을 맞아 기쁜 마음보다는 오히려 분하고 참담한 심정”이라고 개탄했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은 중국 상하이, 난징, 충칭 등지를 오가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는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 헌법 기초의원과 반민특위 위원장 등을 지냈지만 한국전쟁 도중 납북됐다.
 

1935년 난징에서 태어난 김 부회장은 아버지와 함께 중국 여기저기를 오가며 성장했다.
 

그는 “3층 양옥에 아버지가 활동하던 민족혁명당 본부가 들어서 있었는데, 우리 가족과 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 가족이 함께 살았다”며 “연필 한 자루도 귀하던 그 시절 김 박사가 타자기로 ‘타닥타닥’ 문서를 작성하는 모습이 신기해 문틈 사이로 엿보면 그의 아내가 혼내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김 부회장의 생생한 기억은 1948∼1949년 반민특위 활동 시기에도 이어진다.
 

그는 “1949년 5월 말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관사로 온다고 해 아버지가 식구들을 모아서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말고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다”며 “아버지와 이 대통령은 단둘이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배웅 후 아버지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 달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로 들이닥쳐 특위 소속 특별경찰을 무장해제시킨 일이 벌어졌고, 특위는 유명무실하게 됐다.
 

김 부회장은 “비록 처벌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반민특위 덕분에 친일파 1천여명에 대한 수사, 기소, 재판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며 “주요 친일파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반민특위는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나버렸지만, 해방 정국 당시 민족정기를 살리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젊은 세대도 이 정신을 잊지 말고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3·1절 인터뷰] “祖父는 日 쉰들러… 조선 청년을 동지로 생각하고 변론 앞장”
2·8 독립선언 재일 한국인 유학생 변호인 후세 다쓰지 손자 오이시 스스무

1919년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 독립선언은 재일(在日) 조선인 유학생들이 제국의 심장인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뒤에는 ‘일본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한 일본인 변호사의 조력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후세 다쓰지(1880~1953). 이 사건으로 기소된 9명의 조선인을 위해 변호에 나서는 등 식민지 시대 많은 조선인을 도운 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후세 변호사는 2004년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도 했다. 지난 25일 후세 변호사의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80)를 만나 2·8 독립선언 사건 당시의 상황과 후세 변호사의 치열했던 삶에 대해 들었다. 1980~2008년 출판사 일본평론사의 사장·회장을 역임한 오이시는 2010년 한국에도 번역 출판된 ‘후세 다쓰지와 조선’을 비롯해 4권의 책을 펴내는 등 할아버지의 삶을 알리는 데 앞장서왔다.   
   
 ▲ 2·8 독립선언으로 기소된 한국인 유학생들을 변호한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가 지난 25일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 있는 자택에서 외조부의 생애에 대해 자신이 집필한 책을 들어보이며 이야기하고 있다.
 

→후세 변호사가 2·8 독립선언 사건을 맡게 된 계기는.

-할아버지는 항소심부터 관여했다. 기소된 한국인 유학생의 친구가 찾아와서 사건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한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중국과 조선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다. 더군다나 유학생들의 행동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맡게 된 것 같다. 2·8 독립선언은 나도 감동할 정도로 훌륭하다. 학생들은 어두운 역사에서 맨 처음 떨쳐 일어난 사람들이다. 할아버지는 2·8 독립선언에서 유학생들이 대한제국의 부활이 아닌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것에 주목했다. 거기에 동조해 그들을 동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8 독립선언은 어떻게 일어나게 됐나.

-그해 음력 정월은 2월 1일이었다. 8일의 독립선언은 새해 축하를 끝낸 조선인 유학생들이 체포를 각오하고 감행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특별고등경찰(일본 구 경찰 중 정치·사상 관계를 담당)의 주목 대상이었다. 촘촘한 감시망을 뚫고 그들은 그날 오전 한글, 영어, 일어로 쓰여진 독립선언문을 몰래 각국 대사관과 신문사, 학자 등에게 보냈다. 오후 2시 간다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다. 경찰에 의해 즉시 해산됐고 체포자가 나왔다. 독립선언문을 만들어 뿌린 것이 출판물의 인쇄·발행·배포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출판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후세 변호사가 사건을 맡았을 때의 상황은.

-재판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8일 체포돼 10일 기소, 15일 1심 판결, 3월 21일 항소심 판결, 6월 26일 상고심 판결이 나왔다. 채 5개월도 되지 않아 상고심까지 끝난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반일 사건의 처리는 길게 끌수록 통치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대개 즉결 처리했다. 기소된 9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내란예비죄가 아니라 출판법으로 기소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항소심에 관여하기 전 1심을 담당한 두 명의 변호사는 ‘국헌 문란이기 때문에 유죄를 인정하지만 젊은이들이니 집행유예를 부탁한다’, ‘조선은 일본에 합병됐기 때문에 이들의 행위는 일본이라는 본가의 행랑방을 빼앗은 정도다. 그렇다고 일본의 국체가 붕괴되는 일은 없다’며 감형을 호소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대체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며 그들을 나무랐다. 할아버지는 당국의 온정을 바란 것이 아니라 2·8 독립선언을 한 청년들의 생각을 존중하며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919년 일본은 러시아 소비에트 정권에 붙잡힌 체코군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시베리아를 침공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논리를 역이용해 “체코의 독립을 도왔던 일본이 왜 조선의 독립은 돕지 않는가”라고 검사에게 질문하며 피고인석과 방청석을 열광케 했다고 한다.
 

→조선인과 대만인 등 식민 치하의 국민들을 도우면서 후세 변호사는 두 번의 변호사 자격 박탈과 두 번의 투옥을 경험했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할아버지는 기독교(그리스 정교) 세례도 받았지만 그전에 중국 묵자를 공부했다. 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이웃의 아픔은 곧 자신의 아픔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할아버지의 주변에서 가장 아파하는 사람이 우연히도 조선인이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조선인을 도운 것은 아니었다. 우유 배달을 하는 조선인이 당시에 매우 귀했던 우유를 공짜로 넣어주거나, 집마다 1명씩 차출되는 방공훈련을 할아버지 대신 해준 사람도 있다. 할아버지와 조선인 간에는 마음의 이어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2009년 다큐멘터리도 제작됐지만 아직 후세 변호사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느낌이다.

-동의한다. 할아버지가 좌익이었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나도 여든 살이다. 나처럼 할아버지가 한 일을 후세에 전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전전, 전후에 대한 역사가 제대로 평가된다면 자연스럽게 할아버지가 한 일도 평가받지 않을까 기대할 뿐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아직도 식민 지배와 관련된 청산 작업이 지지부진하다.

-어려운 문제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전체의 틀을 보지 않고 위안부나 강제연행 같은 개별 문제를 놓고 무엇이 사실인지 일일이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틀리기 쉽다. 더 큰 틀에서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면 (식민지배와 관련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이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나.

-일본의 식민 지배, 아니 그 이전에 청일전쟁이 끝난 뒤 명성황후 시해부터 시작된 역사에 대한 사죄나 배상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한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돼서 경제협력이나 무상지원이 실시됐지만 그런 정치적인 조치 말고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사죄나 배상은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이것이 일본이 독일과 다른 점이라고 본다. 그게 제대로 되지 않으면 한국인은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잊혀진 3·1절] “물려받은 건 가난뿐… 원망 많았지만 그래도 존경합니다”

“무명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이란 게 평탄할 리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항상 자랑스럽습니다.”

3·1절을 앞두고 27일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증손자 이범증(71)씨는 “증조부님의 행적이야말로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니겠냐”고 말했다.
   
   
 ▲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이범증씨   

 

  ▲ 동암 차리석 선생 아들 차영조씨

 

석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내각수반)을 지냈다. 경북 안동 유림명문가의 99칸짜리 대저택(임청각·보물 182호)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국운이 기울자 모든 기득권을 버린 채 1911년 만주로 떠났고, 전 재산을 다 바쳐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학계 평가에 비해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씨는 “증조부를 비롯해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독립운동의 길은 가족들에게도 험난했다. 이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임청각과 토지 등을 다 팔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집안에 한 명이라도 독립운동을 하면 가문이 망한다고 했는데 우리 집안은 삼 대가 했다”며 “광복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난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이 선생의 3형제와 아들, 손자, 조카들까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7남매 중 막내인 이씨는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자녀들을 돌볼 틈이 없었다”면서 “그나마 혼자 대학을 나올 수 있었던 건 제일 늦게 태어난 덕분”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학창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커녕 대학 시절에도 친구 자취방에서 얹혀 지내며 스스로 학비를 댔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30년 넘게 교사 생활을 하다 2007년 퇴직했다. 서울 중앙중 교장을 맡았던 마지막 8년 동안에는 3·1절이 되면 학교 홈페이지에 특별한 훈화글을 남겼다. 이씨는 “‘선열들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는 글귀를 매번 썼다”면서 “개인주의가 심화된 세대인 만큼 학생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비서장 등을 지냈고 1962년 건국훈장을 받은 동암(東岩) 차리석(1881~1945) 선생의 아들 차영조(71)씨의 유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씨는 “아버지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다”며 “어머니는 그때부터 충무로에서 사과궤짝 위에 양담배를 올려놓고 장사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양담배 판매가 불법이었지만 젊은 여자가 자식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으니 어머니는 매일 단속을 당해도 다음날 좌판을 벌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차씨는 광복 이후 정부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한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정부는 친일파에게는 거꾸로 면죄부를 주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보호해 주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돈과 먹을 것을 달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게끔 교육이라도 시켜 줬으면 좋았을 텐데 전혀 도움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13세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뒤부터는 ‘아이스께끼’ 장사, 여관 심부름 등 안 해본 일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씨는 병원 갈 돈이 없어 어머니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던 때, 처음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는 배고프게 살면서도 항상 ‘아버지는 훌륭한 독립운동가’라고 강조했다”면서도 “유년시절엔 많이 원망했다”고 고백했다. 전력검침원과 건설노동자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그는 1977년부터 홀로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회 일을 시작했다. 차씨는 “2019년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 그때까지 국내에 임시정부 기념관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지난 26일부터 이상룡·차리석 선생 등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인물 열전 60권을 전시하고 있다. 홍선표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공적이 뚜렷하지만 국민에게 낯선 이름들을 소개하는 이번 사업을 계기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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