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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몸과 마음은 텅 빈 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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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몸과 마음은 텅 빈 것(2)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04/12 11:39

사진=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몸과 마음은 텅 빈 것(2)
 


어제에 이어 오늘은 ‘조견(照見)’과 ‘오온(五蘊)’ 그리고 ‘개공(개空)’에 대해 알아봅니다. 관자재보살께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 보시고’ 일체 고액을 건너신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깨달은 분이기 때문에 중생의 삶처럼 고뇌와 문제가 가득한 삶이 아닙니다.  

지혜로써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인생이며, 저 언덕에 건너간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깊은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조견오온개공>에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은 ‘오온이 모두 공한 것으로 비춰본다는 뜻입니다. ‘조견’의 뜻을 좀 더 살펴보면, ‘밝히 본다.’ 또는 ‘저 먼 곳으로부터 내려다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오온’은 범어로 판챠 스칸다(Panca Skadha)인데 그 뜻은 ‘다섯 가지 쌓임’이란 말입니다.

첫째, 색온입니다.
 
색온은 스스로 변화하고 다른 것을 장애하는 물체를 말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위시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은 색온에 해당됩니다. 색온의 본래 의미는 ‘무너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질의 특성은 언젠가는 없어져 버립니다. 인간의 육신 또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지요.
 

둘째, 수온입니다.
 

수온은 고(苦)와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온은 괴롭다 즐겁다, 좋다 나쁘다, 달다 쓰다 등의 감각을 느끼는 일차적인 마음의 감수(感受) 작용인 것입니다.
 

셋째, 상온입니다.
 
상온은 외부로부터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해보는 마음의 요소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배척하는 등의 마음작용을 상온이라 합니다. 상온은 일종의 지각(知覺) 작용이지요. 느낌이나 감각의 인상을 머리속에서 정리하는 표상(表象) 작용을 일컫는 것입니다.
 

넷째, 행온입니다.
 

행온은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즉, 앞에서 받아들인 마음의 작용이 계속 이어지는 상태를 행온이라 하지요. 행온은 분별한 감정을 생각으로 굴려서 마음의 행위를 계속 이어나가는 의지와 행동 작용을 말합니다. 또한 잠재적이고 무의식적인 충동력을 행온이라 합니다.
 

다섯째, 식온입니다.
 

식온은 의식하고 분별해서 아는 마음의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또한 식온은 모든 인식의 주체가 되는 마음의 작용을 이르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모든 인식을 한꺼번에 일컫는 것을 식온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오온’의 다섯 가지 중에서 수 상 행 식의 네 가지 정신작용은 아주 미묘해서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온’에서 색온은 인간의 육신에 해당되는 부분이고, 나머지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은 인간의 정식적인 면에 해당됩니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육체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세분되어 나누는 것이지요.

'오온’을 쉽게 풀이하면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다섯 가지 작용 때문에 인간이 아닌가요?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으로 관찰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산다고 했을 때 먼저 ‘좋다, 나쁘다.’의 수온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런 상상의 끝에 가면 물건을 사게 되는데, 그것이 행온작용입니다. 이어서 식온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 물건에 대해 관찰하고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등의 구상작용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은 ‘개공(皆空)’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개공’은 ‘텅 비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여기서 ‘공(空)’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부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변성(不變性)과 가변성(可變性)입니다. 불변성은 그대로 진(眞)의 차원이고, 가변성은 여(如)의 차원입니다. 예를 들어 꿈을 꾼다고 했을 때,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은 온데간데없고 그대로 이불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있는 상태는 ‘진’의 차원입니다. 반대로 꿈속에서 꿈을 꾸는 동안 온갖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여’의 차원이지요.
 

‘오온’과 ‘개 공’도 위의 두 가지 입장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온’ 그 자체가 그대로 ‘공’이며 진리라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온’은 영원불변한 것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온’은 가변적이어서 환영적(幻影的)이며 비실재적(非實在的)인 차원입니다. 이것은 ‘여’의 입장입니다. 대부분 ‘오온 개 공’을 가변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에 ‘공’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자면 ‘공’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것은 더욱 아닌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존재의 실상이 바로 ‘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괴로움에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몸과 마음이 텅 비었으면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게 될 때 괴로움은 이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존재의 실체를 텅 빈 것으로 바로 아는 일이 곧 반야입니다. 그러나 근본이 텅 빈 것이라고 해서 허무하거나 무상한 것이 아닙니다. 텅 비었다는 것은 무한히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4월 11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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