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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유규(柳規)
오피니언

청백리 유규(柳規)

이승식 기자 입력 2017/05/27 23:18
청백리 유규(柳規)를 아십니까?
 
중국.후한(後漢)시대 관서지방 출신으로 품성은 강직하고 재능이 뛰어난 양진(楊震)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익히기를 좋아해 사람들이 관서공자(關西孔子)라고 부르기도 하였답니다. 청렴결백을 신조로 삼은 그가 재상자리에 오르고 보니 조정 관리들은 대부분 부정부패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왕께 여러 차례 간절한 상소문을 올렸으나 도리어 그들의 모함을 받아 파면을 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치고 말았답니다. 그가 남긴 (天知, 地知, 我知, 汝知) 즉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있다는 뜻의 양진사지(楊震四智)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기억이 날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관서공자 양진은 중국의 첫째가는 청백리요. 방촌 황희 정승은 조선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고 있습니다. 인류 태초로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돈과 권력에 욕심 없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만 그렇기에 청렴결백을 생활화 했던 조상들이 더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조선 9대왕 성종 치세 1473년 2월 10일자 실록에 ‘유규(柳規)’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소개됩니다. 그는 조상덕택에 음서로 처음 벼슬길에 나섰으나 무과급제 후 황해도 ‘관찰사’를 거처 종 2품인 ‘경주부윤(경주시장)’으로 재임하던 때였습니다. 하루는 당시 형사소송에 불리한 피의자가 찾아와 뇌물을 바치며 잘 처리해 달라는 청탁을 하였습니다.
 
대노한 유규는 그자에게 곤장을 치게 한 뒤 옥에 가두었는데 그날 밤 옥중에서 그만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의 책임을 통감하고 경주부윤 자리를 사직한 뒤 고향인 전라도 남원에서 칩거하며 두 번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규는 슬하에 적자(嫡子) 자환(子煥)과 서자(庶子) 자광(子光),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자광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영특했지만 서출신분이라 28세가 되던 해 겨우 경복궁 건춘문(동문)을 지키는 갑사라는 문지기 자리를 얻어 벼슬길에 나섰습니다. 1467년 함길도 길주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자광 나서서 난을 평정하자 요즘말로 국방차관에 해당하는 정5품 병조정랑에 임명되었습니다. 
 
조선 8번째 왕 예종이 즉위한 1468년 남이장군의 모반사건을 고발하여 그 공로로 익대공신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종은 특별히 유자광의 부친에게 종이품 ‘가정대부행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리자 유규는 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정에 나아가 첩지(임명장)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 후 늙었음을 핑계로 낙향하기를 간절히 청하니 예종은 유규에게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제수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하였답니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녹(祿)을 내리도록 배려하였으나 이때 유규의 나이 73세로 낙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답니다. 
 
유규가 생전 1453년 감찰(監察)업무를 담당하던 장령(掌令) 자리에 있을 때 권력층 대신들에게 직언을 잘하여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이듬해 종3품 집의(執義)로 승진되었습니다. 성품이 곧고 끊고 맺음이 분명하여 관리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뛰어나니 유규가 부임했던 고을마다 그의 공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실록 성종 4년 2월 10일자에 기록된 졸기(卒記)에 유규는 가정생활이 엄격하여 자식을 대할 때에도 반드시 관대를 갖추고 대했으며 큰아들 자환(子煥)이 고관대작이 되었으나 한 번도 자랑을 하거나 내색을 하지 않았답니다. 죽기 전에 자신의 상사일체(喪事一切)는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르도록 유언하였답니다.
 
유규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정숙(貞肅)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절조(節操)를 굳게 하여 간사(幹事)하는 것을 정(貞)이라 하고 심지(心志)를 지켜서 결단(決斷)하는 것을 숙(肅)이라고 했답니다. 요즘에 법을 다루는 검찰이 ‘돈봉투만찬’ 사건으로 검찰이 입방아에 올라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국민 대다수가 검찰 뿐이겠냐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니 유규(柳規)같은 청렴결백한 공직자는 현실적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산(茶山)선생은 “모름지기 목민관이란 모든 행정에 앞서 몸을 바르게 하고 마음가짐은 항상 청렴결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정권이 닻을 올리는 이 시점에 바른 공직자가 많이 등용되어 우리국민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승  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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