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약속: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남아공에서 본인이 게이이면서 소수자 인권을 위해 싸운 백인 인권변호사이자 헌법재판관의 이야기이다.
현직 헌법재판소 재판관 에드윈 캐머런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인종차별로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으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보육원에 보내질 정도로 가난했고, 가난했지만 백인이었으므로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며, 남아공의 민주화 과정에서 유능한 인권 변호사로 활약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게이임을 인정하고 HIV 감염인임을 공개할 용기를 얻어, 소수자를 위한 싸움에 기꺼이 나선다.
백인으로서 체제의 수혜자이자, 성 소수자와 HIV 감염인이라는 복합적 정체성 속에서 고뇌하는 개인의 모습, 나아가 극적인 남아공의 민주화 과정에서 ‘법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 책을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로 만든다.
특히, 저자의 표현처럼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법’의 외피를 쓰고 있었으므로, ‘법의 정의’를 통해 체제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은 남아공의 민주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시절 흑인의 이동을 금지했던 <통행법> 폐지 재판, 만델라의 변호사 자격 박탈을 둘러싼 재판, 반역죄를 묻는 재판에서의 법정 공방, HIV 감염인의 인권 보호를 위한 재판, 에이즈 치료제의 보급을 막았던 ‘민주 정부’와의 법정 투쟁 등의 이야기가 이 책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데 꽤 흥미롭게 읽힌다.
1994년 한국과 마찬가지로 ‘타협에 의한 민주화’의 경로를 밟았던 남아공의 사례는 구세력과 공존하면서 민주주의를 민주화해야 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지점들을 던진다.
책 속으로
온 마음을 다해, 나는 동성애자이고 싶지 않았다. 낙인이 찍히고 고립되고 욕을 먹는, 성 정체성이 다른 부끄러운 소수자, 그 행동이 너무 경멸스럽고 죄 많고 부도덕해서 범죄로 간주되었던 그런 사람들의 집단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맹세했다. 내가 정말 동성애자라면, 자살하리라. 이후 다행히도, 나는 신중하게 그 최종 결정을 미루곤 했다. …… 이후 15년 동안, 거의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의지의 마지막 한 가닥까지 사용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이 자각과 싸우며 보냈다.
트세코 사이먼 은콜리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해 활동하던 용감하고 주장이 분명한 인물이었다. 사이먼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그는 타운십 출신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지도자였던 동시에, 공개적으로 당당히 커밍아웃한 게이이기도 했다. 성적 지향에 관해 투사와 같은 용기를 보였던 사이먼 덕분에 반아파르트헤이트 저항에 참여했던 국내 지도자들은 레즈비언과 게이의 평등에 대해 가졌던 거부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헌법의 평등 조항에 성적 지향이 포함된 것은 사이먼의 용기에서 비롯된 직접적인 결과였다. 성적 지향의 정치는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가외의 것이 아니었다. 존재의 중심이자, 정치적 헌신 전체의 중심이었다.
나의 존재를 통해, 에이즈를 둘러싼 아프리카의 엄청난 부정의를 드러낼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미화 1달러 미만으로 살고 있는 대륙에서 나는 미화 4백 달러에 달하는 약값을 매달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프리카의 빈곤, 그 한가운데에서 저는 당신들 앞에 서있습니다. 저는 건강과 체력을 돈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법이 없었다면 아파르트헤이트가 오랫동안 그렇게 효과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한 법이 없었다면, 분명 그 체제는 훨씬 가혹하고 악독하고 파괴적이며 비인간적이었을 것이다. 법률 활동을 통한 저항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집행 속도를 늦추고 부정의를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길 거부했던 정직하고 원칙에 충실한 판사들, 그리고 변호사들의 활동이 있었기에 더 나은 법체계, 즉 법이 불의와 불평등이 아니라 정의와 평등을 수호하는 체계로 변화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에드윈 캐머런.
195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기기사였는데 가족들은 늘 이사를 걱정해야 했다. 캐머런이 일곱 살 되던 무렵 큰누나 로라가 사고로 죽었다. 아버지는 큰딸의 장례식에 교도관들의 호송을 받아 참석했다. 캐머런은 몇 해 동안 작은누나와 아동보호기관에서 살았다.
극심한 인종차별 국가였던 남아공에서 백인으로 태어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는 게이였다. 럭비도 하고 여자도 사귀었지만 소용없었다. 성인이 되면서 게이 정체성을 수용한 그는 서른 살 무렵엔 남자 애인과 동거했다. 1986년에는 HIV 양성반응 진단을 받았다. 요컨대 그는 동성애자에다 HIV 감염자다. 에드윈 캐머런은 지금 남아공 최고법원인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다.
[책과 삶]헌법은 ‘다름’을 존중하고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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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약속>에는 그가 헌법재판관이 되기까지의 이력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온다. 그러나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식의 설명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남아공 헌법과 남아공 민주주의의 빛나는 성취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책을 읽고나면 남아공 헌법과 남아공 민주주의가 왜 대단한 것인지, 달리 말해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왜 소중한 것인지를 납득하게 된다.
1994년 남아공은 40년 이상 지속된 아파르트헤이트(백인 정권의 인종차별 정책) 시대를 끝내고 새 헌법을 발효했다. 그 이전 3년 동안 기존 백인정권과 흑인 대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협상을 벌인 결과물이었다. 헌법 전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 남아프리카인은 과거의 불의를 인정하고, 우리 땅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고통을 당한 이들을 기리며, 우리나라의 건국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남아프리카가 이 나라에 거주하는 모든 이에게 속하며 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믿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고 다양성 속에서 하나가 된다고 명시한 대목이 중요하다. 흑백 인종분리 정책으로 커다란 상흔을 입은 국가였으니 다양성을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놀라운 점은 이 헌법에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 명시돼 있다는 점이다.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을 명시한 건 남아공의 1994년 헌법이 세계 최초다. 헌법 조항은커녕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 입법조차 가로막히고, 군대 내에서 합의에 따른 동성 간 성적 관계까지 처벌하는 한국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남아공 사람들은 헌법과 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다양성’의 가치를 인종이나 피부색, 성별, 종교, 연령, 장애 유무, 양심, 언어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별의 범주에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박해도 포함시켰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종식이 하나의 인종, 하나의 피부색, 하나의 성별만이 우월하다는 가치관을 끝장내는 일이라면, 수적으로 절대 열세여서 훨씬 더 헌법적 보호가 필요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도 철폐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성소수자들을 대변해 입헌 과정에 참여했던 캐머런은 이 같은 주장을 적극 개진했다. 헌법 조항은 그저 법전 속의 글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새 헌법이 발효된 1994년 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에드윈 캐머런을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했다.
물론 헌법이 선진적이라고 해서 현실이 저절로 선진적인 것으로 변모하지는 않는다. 다양성에 대한 헌법의 약속은 헌법재판소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현실화했다. 2002년 명문 공립학교 더반 여자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수날리 사건’이 대표적이다. 남인도인 타밀족 후손인 수날리 필라이는 2002년 9월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코를 뚫고 그 안에 금 장신구를 넣었다. 부모는 청소년이 되었음을 기념하는 종교적 의례라고 주장했다. 학교는 학칙 위배이며, 수날리의 코걸이를 허용하면 다른 학생들의 복장 일탈을 규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수날리의 손을 들어줬다. 그 이유는 상식적이면서 논리적이다. 헌법재판소는 “남용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자기표현을 하려는 순수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된다”며 “지금까지 자신의 종교나 문화를 표현하는 데 두려움을 가졌던 다른 학생들이 표현할 용기를 갖게 된다면, 이는 축하할 일이지 염려할 일이 아니다. 더 많은 학생이 학교에서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자유롭게 표현할수록, 우리는 헌법이 상상하고 있는 사회에 좀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밝혔다. 헌법 정신을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헌법재판소의 노력은 보건의료와 주거권 등 사회경제적 문제들에서도 꾸준히 전개됐다.
남아공의 HIV 감염인들은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 더 어이없는 일을 겪기도 했다. 만델라에 이어 1999년 대통령이 된 음베키는 에이즈가 바이러스와 무관하다는 논리를 펴며 정부 차원의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 보급에 제동을 걸었다. 대통령의 고집이 헌법재판소 판결로 좌절되긴 했지만, 그 결과 약 33만명의 에이즈 환자들이 희생됐다.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캐머런의 유연하면서도 강건한 신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헌법이라도 그 자체만으로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가난한 흑인 어린이를 위한 공공학교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보다 퇴보했고,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맞아 죽는 사건도 일어나고 있으며, 인종적 불평등도 해소되지 않았다. 대립하는 정당들 간의 정치적 대립 또한 ‘파괴적인 수준’이다. 캐머런도 이런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시대적 열망을 담아 공중에 띄워진 종잇조각에 불과했던 헌법이, 현실에서 권력을 규율하고 진보를 가능케 하는 헌장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았다”며 헌법의 근본 가치에 신뢰를 보낸다. 그 가치란 다음과 같다. “헌법 전체가 우리의 다양성이 그 자체로 가치 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인으로서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는 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름에 대한 약속은 헌법 전체가 터 잡고 있는 소중한 기틀이다. 우리 헌법의 묵시적인 ‘기본 가치’인 것이다.”
번역자인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다문화학과)가 역자 후기에서 밝힌 번역 경위가 흥미롭다. 2014년 남아공 헌법재판소를 방문하는 길에 김이수 헌법재판관이 요하네스버그 공항 서점에 진열돼 있던 이 책을 주면서 번역을 권했다는 것이다. 현재 헌재소장 직무를 대행 중인 김이수 재판관은 지난 19일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됐다.
에드윈 캐머런 지음 | 김지혜 옮김 | 게이법조회 감수 | 후마니타스 | 416쪽 | 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