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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세월호 사건에 대한 신학적 성찰..
오피니언

② 세월호 사건에 대한 신학적 성찰

김영한 박사 기자 입력 2017/06/11 20:28
<1> 생명 존엄성 사상

예수님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천하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 소외자의 인격과 인권을 소중하다고 말씀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들의 천사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천명하신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으로 말씀하신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b). 사도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 위기에 몰렸다. 바울은 먼저 짐부터 바다에 버리라고 요구했다. 결국 모두를 살린 것은 생명을 가장 먼저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 바울이었다. 

<2> 십자가 신앙

희생자 유족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또는 "하필 왜 내 자식을 데려갔느냐"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번영과 성공의 신앙으로는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 어떤 말로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하나님, 왜 날 버리십니까?'라며 항의를 했다. 하나님은 침묵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아들과 함께 계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울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은 죽은 예수가 3일 후에 부활하심으로 보여졌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아들 가운데 보이지 않는 침묵 가운데서 계신 것이다.

2) 소금과 빛의 리더십 실천

<1> 교회 지도자들의 솔선수범과 언행일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이번 방한한 교황으로부터 솔선수범과 언행일치의 리더십을 배울 필요가 있다. 교황은 그렇게 스스로 검약을 실천하면서 교회와 성직자, 수도자 등 '집안 사람'들에 대해서는 "너희가 제 역할을 똑바로 하고 있느냐"고 질타하였다. 그는 양(羊)에게는 따뜻하고, 목자(牧者)에게는 따끔한 리더다. 공자가 '슬퍼하되 상처받지 말라(哀而不傷)'고 했듯이, 우리는 너무 슬퍼하지만 말고 다시 삶을 계속해야 한다. 루스벨트가 대공황이 닥치자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야말로 이번에 우리가 참고할 만한 태도이다.

<2> 중재의 리더십: 절대 갈등의 당사자가 되지 않는다

교회는 여태까지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보여준 것 같이 스스로 갈등의 당사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함께 평화를 고민할 여지를 남겨야 한다. 그리하여 중재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너무 좌로 치우쳐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있으며, 극단한 보수주의자들은 너무 우로 치우쳐 사회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3> 슬픈 자들과 울어줌

한국교회는 슬픈자들과 같이 울어주어야 한다. 세월호법 통과가 진통을 겪은 이유는 유가족들이 세월호 참사 구조과정에 드러난 정부의 무능과 신뢰상실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철수 멘토'로 불린 윤여준 전의원의 멘트도 참작할만하다. “근본적으론 불신 때문이다. 유족이 정부를 안 믿는다. 큰 사건 날 때마다 새누리당이 필사적으로 진상규명 안 하려고 하는 걸 국민들이 다 봤다. 세월호 침몰 때도 국가가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고 수습 과정에서도 대통령이 철저한 진상규명을 강조했지만 그렇게 진상규명에 애쓰는 모습을 안 보이니까 분노하고 불신하는 것이다. 이래선 끝없는 평행선으로 갈 수밖에 없다. 유족들의 슬픔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수습의 과정은 의회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서 해야 한다.“ 앞으로 특별법 시행과정에서도 대국적인 견지에서 조금은 양보, 포용하는 생각을 해주면 좋겠다. 

3) 개혁주의 시민정신, 사회의 기본 가치관 심기

품위를 갖추고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는 '기독교 양반'이 한국 기독교인의 모델로서 필요하다. "기독교인은 영성과 도덕성, 공동체성을 고루 갖춰야 한다. 교회는 나오는데 도덕성은 예전과 다름없고, 사회에서 비윤리적으로 산다면 이건 잘못된 믿음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정기적으로 종교 신뢰도 조사를 하는데, 기독교가 바닥이다. 교회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책임감, 윤리의식을 갖춘 의인들을 길러내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물질을 나누는 사랑의 성례전 행위를 해야 한다.

4) 건전한 시민운동 지원: 19세기 영국의 클라팜파(派)(the Clapham)

교회는 사회를 향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단지 설교단과 교회내의 봉사단에 그치지 않고 보다 사회구조의 변혁을 위하여 기독교 시민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도 경실연(1989), 환경연합(1993), 참여연대(1994) 등 시민단체들이 설립되어 반부패법, 환경법, 경제정의법 등의 입법과정에서 사회투명성을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함으로서 시민단체의 존재와 기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시민단체는 국가와 기업 사이에 제3의 기구로서 국가의 권력과 기업의 탐욕이 결합하는 정경유착을 견제하여 사회적 투명성과 부패망 방지의 역할을 한다. 이들 시민단체들이 국가나 기업의 지원을 받으면 투명성이 흐려질 수 있으므로 사회적으로 이해관계와 무관한 교회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 영국의 클라팜파(派)(the Clapham)은 웨슬리 다음 세대인 월버포스(William Wilberforce)를 정신적 지주로 하는 복음주의 정신을 지닌 사회운동모임였다. 당시 클라팜파는 부유한 귀족들이었으나 기독교 신자들로서 의회와 언론에서는 성도당(聖徒黨, the saints)이라고 조롱을 받았다. 영국의 클라팜파 친구들은 “점차 놀라운 친밀함과 유대감으로 굳게 밀착되었다. 그들은 결코 해산되지 않는 위원회처럼 계획을 세우고 일했다. 이들은 클라팜(Clapham) 지역의 대저택들에서 공동의 관심사의 욕구를 지니고 모였는데, 그 모임을 자신들의 ‘내각회의’라고 부르면서 조국의 치욕인 악과 불의에 대해, 그 의를 확립하기 위해 치러야할 싸움에 대해 논했다.” 

이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을 느끼게 하고 실천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것은 강한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이들은 후한 자선을 베풀었고, 노예문제 외에 형벌와 의회법 개혁, 주일학교, 소책자, 크리스천 옵저버 신문 발간 등 대중교육, 식민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의무, 성서공회와 교회선교회 설립지원, 공장에 관련된 법률제정, 결투, 도박, 음주, 동물을 이용한 잔인한 스포츠 금지 캠페인 등을 벌렸다. 이들이 한 결정적인 공헌은 1807년 노예매매제도를 폐지시키고, 1820년 노예들을 식민지에 등록시키고, 그로 인해 1833년 노예밀매매가 종식되고 마침내 노예들이 해방된 것이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하여 19세기에 노예제와 노예무역이 폐지되었고, 감옥제도가 인간다워졌으며, 공장과 광산의 환경이 개선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고,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새로운 사회적 양심에서 유래했으며”이 사회적 양심은 “생동감있고, 실제적인 기독교의 복음주의 부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샬롬나비운동이 오늘날 이러한 사명을 감당했으면 한다.

5) 사회 통합의 역할

<1> 트라우마(trauma)에 깊이 빠져 있지만 말고 새로운 사회 건설로 이끌자

'슬퍼하되 상처받지 말라(哀而不傷)'고 한 공자의 말처럼 슬픔이 너무 격해지고 오래가면 건전하지 못하다. 사람들이 정부 관계자들 탓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논의를 해야 한다. 참사에서 사회 건강 회복으로 논의의 방향을 옮기는 게 바람직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 전체가 아주 몹쓸 세상, 희망 없는 세상이라는 절망감만 있다." "이 절망감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에겐 친구를 위해 자신의 구명조끼를 기꺼이 벗어준 학생들, 자신보다 승객을 먼저 생각한 박지영씨 같은 의인들이 있다".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 덕분에 이 나라가 이만큼 지탱되는 것"이다. "교회는 이웃과 사회에 대한 헌신과 봉사, 책임감으로 무장한 의인(義人)들을 키우는 터전이 돼야 한다"

<2> 증오하지 말고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이끌자

세월호 참사 후 진도 팽목항 부근에 민주노총의 선전물이 등장했다. '슬픔을 넘어 분노하라.' '이런 대통령 필요 없다.' 한 철학자는 신문 기고에서 '분노하라, 거리로 뛰쳐나와라'고 자극했다. 직업윤리를 내팽개친 선장과 선원, 부실 항해를 조장한 해운사, 구조 활동에 무능력했던 공권력은 모두 분노의 대상이다.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지 않으면 무기력이 사회를 지배할 따름이다. 그러나 분노는 증오(憎惡)와 다르다. 부당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분노는 필요하지만 분노가 증오로, 폭언과 폭력으로 번지면 세상은 더 황폐해진다. 희생자들도 그걸 바라진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이들과 그 가족들이 진정 바라는 건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서로 사랑하고 돕고 책임지는 사회가 아닐까.

가라앉는 세월호 안에서 희생자들이 보낸 문자 메시지도 비슷했다. '엄마, 내가 말 못 할까 봐 보내 놓는다. 사랑한다.' '왜? 나도 아들~~ 사랑한다.' '어떡해, 엄마 사랑해.' '우리 진짜 기울 것 같아. 애들아 진짜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다 용서해 줘. 사랑한다.' '사랑해, 고마워.' 증오의 언어는 내려놓아야 한다. 사랑의 언어가 힘이 더 세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불의에 저항하고 낮은 자들을 섬기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도덕적으로 침몰하고 있는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바른 윤리의 지향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청소년들을, 지금의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미래를 여는, 건강한 정신을 소유한 꿈나무들로 세우는데 앞장서야 한다. 

<3> 공공성 의식 각성하고 실천: 책임윤리

현대 사회에서는 나의 행동이 미칠 영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가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동기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비도덕적인 것”이다. 동기도 좋아야겠지만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윤리(책임윤리, responsible ethics)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공성”이다. 신앙이 자기 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이웃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윤리가 공공성으로 나타나야 한다. 더욱이 우리 사회 전체가 책임적인 가치관과 생활태도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변칙을 재주로 생각하고 그것을 영웅시하는 풍조를 지양하고 땀을 흘려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성공하고 인정받는 풍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 것을 사회적으로 앞세우는 운동이 있어야 한다

맺음말

지난 10월 31일 여야의 세월호특별법 협상이 타결된 후 그동안 200일의 비합리, 비정상 상황을 정리하고 우리 사회를 한 걸음 앞으로 전진시키기 위한 작업들을 차분하게 진행시켜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거의 대부분 드러났다. 돈에 눈이 먼 선사(船社)의 불법 증축과 과적, 운항 미숙이 사고를 불렀고 선장과 선원, 정부와 해경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사고 수습이 3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도 유족들이 거듭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것에 국민이 동의하는 이유는 한 점 의혹도 없게 하자는 뜻에서다. 지나치게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참사를 정치적 문제로 변질시킬 수 있다. 이제 매듭 짓고 망각해서는 않된다. 아픈 기억 놓아버리면 '알츠하이머 사회'로 굴러가며 다시 발생할 수 있다. 기억을 제도화시키야 한다. 사회의 시스템을 투명한 법치로 바꾸어야 한다. 참된 정의가 실현되는 윤리적인 토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안전사회의 길이다. 

시스템과 소프트웨어가 아무리 잘 갖추어져도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수준 이하의 사회 구조를 방치해 온 지도층의 통절한 자기반성이다. 그리고 국민들이 어려운 시기에 고통을 분담하고 단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질 우선이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 한국사회를 인치가 아니라 법치의 투명한 사회로 혁신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은 민주화 이후 20년 넘게 공리공담(空理空談)과 정파적 이해에 사로잡혀 선진국 진입에 필요한 사회적·정신적 토대를 쌓는 데 실패했다. 이에 예언자 사명을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에 광야의 한 목소리로 5년 전에 샬롬나비 시민운동이 출발한 것이다. 그리하여 '압축적 근대화'의 부정적 유산을 넘어서는 혁신 운동에 앞장서는 것이 나라를 절망의 늪에서 건져올리는 길이다. 그들이 이념과 당파의 차이를 넘어 "내 탓이오!" “감사, 나눔, 섬김”이라는 시민운동을 전개해온 샬롬나비의 정신을 확신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한편, 위의 내용은 샬롬나비가 2014년 11월 28일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을 주제로 개최한 제9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주최 측의 자료 제공으로 서비스하지만 해당 게시물의 저작권 및 법적 권한은 제공자 측에 있음을 밝힙니다. 내용의 원할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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