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연(婦椽)을 아십니까?
한옥을 처마 밑에서 쳐다보면 둥근 연자목 끝에 짧게 각진 서까래를 덧붙여 얹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겹처마 위에 덧붙여 놓은 이 짧은 서까래를 ‘부연’이라 부르는데 처마를 깊게 할 목적도 있지만 여인의 저고리 소매 끝처럼 곡선의 아름다움을 살려주는 장식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호남의 끝자락에 남도의 금강산이라는 기암괴석을 머리에 이고 우뚝 서 위용을 뽐내는 월출산이 있습니다. 이 산에는 신라 말기에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도갑사가 있는데 신라의 국운이 날로 쇠하자 왕은 남도의 명산 월출산에 대가람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전국에서 이름난 대목장을 불러 사찰건립을 명하니 국가차원에서 발주한 공사인 만큼 대찰건립공사는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되어 갔습니다. 워낙 큰 공사다보니 참여한 인원이 수백 명으로 분야별로 책임자가 한명씩 있었으며 서까래 부분의 담당 목수는 박씨 노인이었습니다. 사찰은 웅장하고 장엄하면서도 또한 부드러우면서 아름다움을 갖춰야 하므로 평생을 나무와 함께한 박씨는 이번 불사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결심하고 혼신의 노력과 정성을 들여 서까래를 다듬었습니다. 상량식을 며칠 앞두고 서까래 다듬기 작업이 거의 마무리 되어가던 어느 날 이를 어쩐다? 다듬어 놓은 서까래 길이가 모두 조금씩 부족하게 잘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량식 날짜가 잡혔으니 나무를 새로 구입한다 해도 제때에 다듬기를 끝낼 수가 없으니 완공이 늦어지면 왕명을 거역한 대역 죄인이 되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빈틈없기로 소문난 박씨는 자신의 실수로 공사에 차질이 생겼으니 머릿속이 텅 비어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들어왔으나 안절부절 했지만 별 뾰쪽한 방법이 없자 사라보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아침에 일하러 나갈 때에도 건강해 보였는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저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니 집안 식구들은 약을 지어오고 의원을 불러와도 박씨는 안에서 걸어 잠근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무슨 큰 걱정거리가 있는 듯 보였으나 도통 말을 하지 않으니 가족들도 답답해하는데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아무리 큰 걱정거리가 있다하더라도 혼자서 해결하려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면 더 쉽지 않겠느냐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며느리에게 까지 못할 짓이라고 생각한 박씨는 자신의 실수를 얘기하여 사정은 알게 되었지만 며느리 또한 당장에 내 놓을 만한 묘안은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히니 너무 심려치 말라는 며느리의 위로를 뒤로하고 박씨는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대목장과 공사 관계자들이 병문안 차 박씨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며칠 후 상량식을 끝내고 서까래만 올리면 공사는 곧 마무리 될 것이니 아무걱정 말고 어서 쾌차하라는 덕담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병문안 손님이 돌아가자 집안은 다시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고 툇마루에 걸터앉은 며느리의 눈에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래 줄이 들어왔습니다. 빨래줄 중간 부분이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부분에 긴 장대를 매달아 놓았는데 며칠 전 부러지는 바람에 급한 대로 짧아진 장대 아래쪽에 작대기를 덧대어 묶어 놓았던 것입니다. 작대기에 묶여진 장대를 보는 순간 며느리는 시아버지 방으로 달려가 서까래가 짧아진 만큼 덧대어 이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순간 평생을 나무와 살아왔던 박씨 동공에서 밝은 빛이 나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한걸음에 절로 달려갔습니다. 짧아진 서까래 위에 또 하나의 서까래를 덧대어 완성하고 보니 신라국에 그 어느 건축물보다 아름답고 웅장하며 부드럽게 휘어져 하늘로 날아오를 듯 솟아오른 추녀 끝은 보는 사람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답니다. 며느리의 영감으로 만들어졌다는 박씨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이 며느리婦와 서까래椽을 써 婦椽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참고 : 조선시대 건축물 백과사전격인 ‘영건도감의궤’의 기록에는 모두 ‘付椽’으로 표기 했지만 ‘화성성역의궤’에서 처음으로 ‘婦椽’으로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쓰이고 있답니다.
이 승 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