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대한광복회 백산 우재룡 평전 출판기념회 개최..
기획

대한광복회 백산 우재룡 평전 출판기념회 개최

문해청 기자 입력 2019/10/21 16:15 수정 2019.10.21 22:03
일제식민지 철권통치 우마시기 1910년대 독립운동 만주기지 1주일 2-3회 국내외 오가며 헌신 투쟁한 자주독립운동의 표상
백산우재룡선생기념사업회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가 주최한 대한광복회 백산 우재룡 출판기념회 / ⓒ 문해청 기자
백산우재룡선생기념사업회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대한광복회 백산 우재룡 평전 출판기념회 /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애국지사 백산 우재룡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이명식李明植)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배한동)는 19일 두류공원 대구광역시문화예술회관에서 지역 인사와 시민 300여명을 모시고 사회자 문창식 센터장(간디문화센터, 대구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진행으로 “백산 우재룡 평전”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성악가 테너 이병용 “10월 어느 날에” 노래를 시작으로 섹스폰 이규리 연주, 내빈소개, 공동주관단체 이명식 회장(백산 우재룡 선생 기념사업회) 인사말씀, 배한동 상임대표(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께서 초대사를 했다. 이어 ‘백산 우재룡 평전’ 저자 충남대 이성우 교수(충청문화연구소) 인사 및 [소설 대한광복회] 저자 정만진 역사소설가 ‘백산 우재룡 평전’ 소개, 박지극 시인 시낭송, 유족을 대표하여 우대현 회장의 인사말씀 등 문화공연으로 마무리했다.

다음은 애국지사 백산 우재룡禹在龍 선생 기념사업회 이명식 회장 ‘인사말씀’ 요약이다.

백산 우재룡 지사의 생애를 소개한다. 독립투사 우재룡 지사 호는 백산이며 1884년(고종21) 갑신년 1월 3일 경남 창녕군 대지면 왕산리에서 단양 우씨 부 우채희, 모 진주 강씨 강부여 5녀 1남 막내 아들로 출생했고 아내 김소전金小田(105세) 여사가 현존하고 있다.

백산 지사는 1903년(19세) 계묘년癸卯年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 입대로 5년 복무하던 중 1907년 정미년丁未年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 되자 귀향했고 몇 달 후 영천 정룡기 대장이 ‘산남의진’ 의병을 일으키자 간부를 맡아 영천, 청송, 영일, 경주 등지에서 일제 정규군을 타격하는 공을 세웠다. 허나 정규군이 아닌 의병이 공격용 무기가 부족한 전투력으로 심한 타격을 당한 이후 팔공산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지만 1년만에 체포되어 종신징역형을 선고 받고 2년을 복역 중에 1910년 경술년庚戌年 소위 합방특사로 석방됐다.

그후 1915년 을묘년乙卯年 박상진朴尙鎭 등과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일제 현금수송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거금을 탈취하여 독립군자금으로 사용하도록 전달하고 전국의 동지를 규합하며 자주독립운동에 헌신하는 활동했다. 또한 만주로 건너가 길림광복회를 조직하고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 동지와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백산 지사는 1919년 기미년己未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평양, 한성 등지에서 무력투쟁을 계속했고 1920년 경신년庚申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밀명을 받고 독립운동단체를 조직 활동 중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18년 복역하다 1938년(54세) 무인년戊寅年 출옥했으며 백산 지사는 1, 2차 걸친 21년 긴 세월 투옥되었다.

백산 지사는 달성군 신당리 자택을 두고 한양을 내왕하며 동지와 대한광복회 재건사업과 자주독립운동 정신계승 및 선양사업에 헌신하다 1955년(71세) 을미년乙未年 서거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유해는 국립현충원(서울)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어있다. 백산 지사의 슬하에 대현, 상현 2남 정숙 1녀 손자 4명 외손자 2명이 있다.

백산 우재룡 선생의 아들 우대현 선생남께서 가족 및 친지와 함께 유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인사말씀으로 화답하는 모습 / ⓒ 문해청 기자
백산 우재룡 선생의 아들 우대현 회장께서 가족 및 친지와 함께 유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인사말씀으로 화답하는 모습 / ⓒ 문해청 기자

이어 유족을 대표하여 백산 우재룡 선생 아드님 우대현 회장 인사말씀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바랐던 일제해방이 됐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곳곳에 친일매국노 적폐세력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현실에 우린 살고 있다. 이 나라는 독립운동가 투쟁으로 나라를 세우고 지켜왔다. 이에 후손으로 자주독립운동정신 계승과 선양으로 우리민족과 민중이 사는 평화통일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백사 기념사업회 회원이신 박지극 시인의 [헌시] “조선 호랑이의 큰 울음소리가 듣고 싶다” - 우재룡 지사님께 평전을 바치며 - 이다.

1949년 6월 30일 밤. 그리 깊지 않은 산골짜기인데도 밤이 밀려오자 사방을 금세 먹물처럼 짙은 어둠에 파묻힌다. 집에서 가져온 헌 홑이불을 나뭇잎더미 위에 깔고 앉았지만 사람의 몸은 땅에서 올라온 습기를 못 이겨 저절로 눅눅해진다.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목덜미에는 새까만 산 모기들이 달라붙어 마구 피를 빨아먹는다. 아까부터 줄곧 온몸을 꿈틀대고 있던 여섯 살 사내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 “아버지는 왜? 집에 올 때마다 밤늦게 오고 집에 와서는 숨어 있다가 새벽같이 어디론가 가요?” 정만진의 소설 [대한광복회]는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산에 숨다’로 시작된다.

1949년 이면 일제가 끝났음은 물론 남한 단독이지만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나 된 시점이다. 그런데도 우재룡은 왜? 이렇게 쫒기듯이 숨어서 지내는 신세가 된 것일까? “낮고 가늘고 긴 김소전의 울음소리가 어린 아들 형제의 머리 위를 지나 계속 하늘로 올라간다.” 정만진의 소설 [대한광복회]는 우재룡의 죽음을 아내 김소전의 울음으로 막을 내린다.

// 조선호랑이, 길을 나서다// 박지극 시인 // 18세 청년 우재룡 대한제국 진위대에 자진입대 / 군대해산 산남의진으로 찾아가 의병이 되다 / 1908년 8월 일제는 / 의병 선봉장 우이견 / 무기징역에 처함 / 땅땅땅 //

// 다시 길 위에 서다 // 1915년 8월 25일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 결성 / 만주지부 길림광복회 결성 / 김좌진에게 군자금 전달 / 경주 효현교 세금마차 탈취 / 친일부호 서도현 처단 / 영월 중석광 습격 /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 / 만주망명, 3.1 만세운동, 국내잠입 / 광복회 재건운동, 주비단 창단 / 1921년 4월 18일 우재룡이 군산에서 피체되다 / 1922년 4월 13일 일제는 우이견에게 / 사형구형, 땅땅땅 / 갇혀 있어도 그는 조선의 호랑이였다.

// 길에게 묻다 // 1945년 해방 / 춘래불사춘 / 광복이 왔으나 광복이 어디 있소 / 밀양사람 김원봉 북한으로 쫓겨나고 / 김구 주석마저 안두희에게 / 백산 우재룡 그렇게 원했던 광복 조국에서 쫒기는 신세 / 백산 선생 길에게 묻다 / 광복이 왔으나 광복은 어디 있소? / 18세 청년 우재룡 / 70세 노인 백산 / 그의 참 이름은 독립군 /

// 길은 끝나지 않았다 // 우공. 이제 우리가 지켜드리리다 / 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 숨지 않아도 됩니다 / 우공과 닮은 형형한 눈빛의 아들이 / 그대 영전에 평전을 바치고 있지 않소 / 아무거리낌 없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셔서 / 그 옛날 눅눅한 흙바닥에 누웠던 여섯 살 아들을 / 마음껏 안아 보시구려 / 영원한 독립군의 아내 김소전金小田 여사는 / 아직도 그대를 연모하는 새아씨 같다오 / 이리 나와 함께 손도 잡고 춤도 추어 보시구려 // 그리고 / 우리 모두는 / 조선호랑이의 큰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오 //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